프롤로그
수건 한 장, 여벌 옷 한 벌, 수영복, 잠옷, 양말, 속옷, 모자, 노트북, 카메라, 충전기, 우산, 선글라스, 선크림, 비누, 모기약, 비상약, 텀블러, 여권, 지갑, 장바구니, 아이의 일기장. 7살 아이의 작은 손을 놓치지 않을 만큼만 가방에 담았다. 그래도 더 뺄 수 있는 짐이 있을까 싶어 물건을 바닥에 쫙 펼쳐 놓고,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을 그려 본다. 이제 배낭을 메고, 아이의 손을 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될 터였다.
7살이 된 나의 아이는 10개국을 여행했다. 베트남을 시작으로 스리랑카, 인도, 파키스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몰디브, 일본, 그리스를 다녀왔다. 27개국을 여행한 엄마와 62개국을 여행한 아빠의 방랑 유전자가 아이의 몸과 마음에도 새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아이 방 한켠에 붙은 커다란 세계 지도 앞에 모여 다음 여행지를 상상하고 떠드는 일은 언제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가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작은 의식이 되었다.
새로운 여행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몇 가지 약속을 했다. 다가올 여행의 지침이 될 것들이었다.
하나, 쓰레기를 많이 만들지 않기
둘, 최대한 현지 음식 먹기
셋, 현지 친구를 사귀어 보기
넷, 동물들을 아프게 하지 않기
다섯, 물을 낭비하지 않기
여섯,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사용하기
일곱, 어떤 일이 생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새로운 여행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우리의 여행에 '사람'과 '배움'이 빠져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아이와의 첫 여행지는 베트남이었다.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던 리조트 앞바다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맑았다. 하지만 리조트 양옆으로 길게 뻗은 날카롭고 뾰족한 철조망 때문에 정작 현지인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누군가를 소외시킨 바다에 더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태국에서 남편과 대판 싸운 적이 있다. 코끼리 트레킹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그 이유였다. 2000kg이 넘는 코끼리는 관광객을 태우느라 쉴 새 없이 무릎을 굽혔고, 뾰족한 쇠꼬챙이로 코끼리를 위협하는 모습을 본 순간, 뜨거운 분노 덩어리가 울컥하고 넘어왔다. 한 번은 동생들과 299,000원짜리 캄보디아 패키지여행을 갔다. 가이드의 빠른 걸음과 설명을 쫓느라 정작 앙코르와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한 자국만 남았다. 트렌드에 뒤처지기 싫어 ‘일본 추천 쇼핑 리스트’에 소개된 물건들을 꾸역꾸역 담아 한국으로 가져왔던 적도 있었는데, 집구석에 박혀 있던 똑같은 물건을 발견하고는 소비가 전부인 여행 방식에 깊은 피로와 좌절감을 맛보았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내가 변한 것도, 세상이 바뀐 것도 없었다. 제자리 걷기를 하는 것 같은 무기력감만 진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여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여행지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매년 약 14억 명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2명 중에 1명이 해외여행을 하고 있다. 여행객들이 지출하는 돈은 무려 1,218조에 달하고, 여행 산업은 전 세계 GDP의 10%를 차지하는 거대 산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막대한 수입만을 생각한다면, 현지인들의 삶이 전보다 더 나아졌을 것 같지만 실상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유엔 세계관광기구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여행객이 쓴 100달러 중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돈은 단 5달러에 불과하다. 95달러는 항공사, 다국적 기업이 운영하는 호텔, 그리고 선진국에서 수입한 각종 고급 식재료와 공산품으로 빠져나간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심각하다. 여행자들은 하루 평균 1.5kg의 쓰레기를 만들어 내고, 1리터짜리 페트병 300개 분량의 물을 사용한다. 여행지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1인당 연간 32kg에 이른다.
우리의 여행을 위해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푸른 나무들이 쓰러지고, 자신의 땅을 지켜 왔던 사람들이 쫓겨났으며, 엄마 품에 안긴 동물들의 새끼를 강제로 떨어뜨려 놓았는지도 모른다. 수영장을 가득 채우기 위해 누군가의 소중한 식수를 빼앗았을지도, 내가 쓴 돈이 현지인이 아닌 크고 거대한 다국적 기업을 더 크고 거대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도 불편한 마음이 쌓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엔은 우리의 여행이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며 다섯 개의 기준을 제안했다. 여행으로 나오는 이익을 모두가 나눠 가져야 할 것, 좋은 일자리를 늘리고 빈곤을 줄일 것, 환경을 아끼고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노력할 것, 문화의 가치와 다양성을 존중할 것, 평화와 안보를 증진할 것. 이렇게 사람, 동물, 자연 그 누구도 해치지 않고 배움이 있는 여행을 ‘지속가능한 여행’이라고 부른다.
지속가능한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나는 여행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쓰는 돈은 누구에게로 갈까?’, ‘내가 버린 쓰레기는 어떻게 처리될까?’, ‘내가 먹은 음식은 어떻게 식탁에 오르게 됐을까?’, ‘어떻게 여행을 해야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평화를 증진하는 여행 방식은 무엇일까?’, ‘여행에서 얻은 배움을 어떻게 내 삶과 사회로 가져올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을 곱씹었다.
나는 기존의 여행 방식을 벗어나 지속가능한 여행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아이들이 경험할 여행은 달라져야 했다. 여행지에 우리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남기고, 빡빡하게 짜인 일정대신 현지인들에게 물어 물어 가보기로 했다. 몸집이 큰 해외 기업이 아닌 현지인들에게 흘러갈 수 있는 소비를 하기로 했다. 동물과 자연을 해치지 않도록 세심히 마음을 기울이고, 숙소에서 물과 물건을 함부로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현지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와 이런 방식의 여행이 가능할지 확인하고 싶었다.
관광객이 붐비던 해변을 벗어나 현지인들과 보랏빛 물속을 마음껏 헤엄치던 스리랑카, 화려한 빌딩이 도시를 수놓은 이주민들의 나라 아랍에미레이트, 에메랄드 빛 바다 밑에 거대한 산호 무덤을 감춰둔 오싹한 몰디브, 세상의 모든 종교가 평화롭게 공전하던 인도, 이슬람 최대 명절인 쿠르반을 보낼 수 있었던 튀르키예,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음을 나누었던 일본까지. 이 책에 구불구불하지만 생생하게 팔딱이는 여행의 시간을 담았다.
우리 가족의 여행 일기를 읽고 마음 한 조각에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함께해 주면 좋겠다. 우리가 지속가능한 여행을 시작한다면, 우리의 여행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르니까. 새로운 여행을 앞둔 우리 앞에 선물 같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