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난폭하게 굴었던 빗줄기가 아침엔 허연 거품까지 물었다. 인정사정없이 퍼붓는 폭우에 초록잎들이 화들짝 놀란 분위기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새들은 황망히 하늘을 살폈다. 온통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햇살의 기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물에 수염같이 바위에 들러붙은 이끼마저 난도질을 당할 것만 같았다.
강한 폭우가 계속되자 지반이 젤리처럼 변했다. 물컹한 땅에서 중심축을 잃고 너럭바위가 비석처럼 쓰러지려 했다. 비탈진 곳에 작은 바위들은 바다로 뛰어드는 펭귄처럼 떼 지어 굴렀다. 그것들은 계곡 속에서 무겁게 발을 저었다. 어떤 것은 여러 개의 덩어리로 짜개져 본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것들은 필시 끓임 없이 구름으로써 더 작고 부드러운 돌멩이가 될 것이다.
땅 위에서 구르기를 멈춘 돌멩이는 푸른 이끼를 돋아냈다. 물속에 가라앉은 돌멩이는 조그만 버들치를 키웠다. 마지막까지 다 부서진 것들은 모래가 되어 서벅서벅 고운 소리를 냈다. 돌의 생김새는 다르지만 자기만의 방식대로 숲 속에서 역할을 다하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햇볕이 모래 밟는 소리를 듣고서는 짙은 회색구름 사이를 비집고 빛나기 시작했다.
백사실 계곡의 숲 천장이 뚫린 곳에는 별서(別墅) 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은 주춧돌과 연못만 남아 오래전 떠난 주인을 그리워하지만, 별서의 주인이 이항복인지, 김정희인지 추론만 할 뿐 누구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멋대로 부레옥잠과 개구리밥을 띄운 연못은 누구인지 알 것이다. 그리고 별서 터 건너편엔 커다란 돌탑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과거엔 돌탑이 낯선 이에게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또한 어느 곳에선 돌탑이 등대처럼 뱃사람에게 바닷길을 알려주었다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돌탑은 무언가 좋은 걸 만날 수 있는 증표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걸 만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길 위에 다듬지 않은 생돌을 주어다 하나씩 올렸던 모양이다.
백사실 계곡에서 나는 감정의 숲이 된다. 감정이라는 나무들로 채워진 숲과 같은 존재. 감정이 발생하는 위도에 따라 한대림, 열대림, 온대림과 같은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산다. 날씨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나뭇가지가 자라고 다채로운 잎사귀가 열린다. 화려하진 않아도 천천히 조금씩 높이 자란 나무들은 충분히 아늑한 숲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의 숲이 울창해질수록 다양한 감정들이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처음엔 조금만 달라도 불편했던 감정들이었지만, 이질적이거나 대척점에 있었던 감정들도 자연스레 하나로 어우러진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없는 것처럼 숲에서 자란 나무는 저마다 필요한 생명이다. 다만, 나무 하나가 온전히 자랄 수 있을 때까지 많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할 뿐. 그것들은 서로를 조금씩 보듬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엔 모든 나무들이 서로 다른 높이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온전한 숲이 되었을 때, 척박한 땅에서 환한 꽃을 피우고 천연의 열매를 맺으며 달콤한 과실을 기꺼이 내어준다. 또한 나의 숲에서 벌어진 일들은 누군가를 위한 즐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숲은 또 다른 존재의 숲과 엮어져 더 큰 숲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서로 꽤 닮았다는 뜻이고, 그러면서도 서로 다양한 가치를 지닌 채 살고 있다는 것일 테다. 요즘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숲은 부러 더 큰 소리를 내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의 버팀목이 되라는 응원의 소리이거나, 잘게 부서진 돌멩이들이 빗물에 굴러가면서 돌탑을 낮게 쌓고 있는 소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