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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오래된 문장

3-1. 사랑이 두려운 이유

by 이 순간


누구나 마음속엔 뒤틀린

오래된 문장이 하나쯤 있을지 모른다.

내면의 결핍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다가

오래전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상담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상처 입은 나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내 안의 상처를 알기에 곧 분리해 다시 아이를 바라보지만,

상담이 끝난 후엔 그 잔상을 조용히 곱씹는다.






얼마 전, 한 작가님으로부터 애정 어린 고백의 글을 받았다.

나는 감동했고 기뻤다. 그런데 동시에 두려웠다.


좋으면 좋은 거고, 기쁘면 기쁜 거지.

왜 두려운 걸까.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이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내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패턴이었다.

어릴 적부터 새겨진, 사랑과 두려움에 대한 비합리적 신념.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다.

내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무언가라고, 철없이 확신했다.


그러나 사랑은 곧 배신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와 오빠에게 향하던 폭력은 어느새 내게도 다가왔다.

나는 당신을 미워했다.

하지만 나를 향한 다정함과 사랑에 또 속절없이 당신을 이해하려 들었다.

어린 나는 차갑게 내려앉는 쇳소리 앞에 무너졌다. 벽과 부딪히는 순간마다 내 사랑은 산산조각 났다.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나는 사랑을 믿으려 한 어리석었던 나 자신을 증오했다.






몸의 아픔보다 더 깊이 남은 것은 욕설이었다.

알아듣지 못한 말들, 혹은 알아듣는 말들이 날카롭게 박혀

내 안의 ‘어버이 자아’가 되어 나를 통제했다.


친구에게 용기 내어 털어놓았을 때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다 맞고 컸지.”

그 말에 나는 내 아픔을 덮어버렸고,

‘그래, 그저 누구나 겪는 일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묶어 두었다.






나는 26살까지 연애하지 않았다.

눈이 높아서가 아니었다.

마음을 내어주면 또 실망할까 두려워 애써 스스로를 가두고 외면했다.


마음은 여전히 누군가를 원했지만, 다가오면 두려웠다. 상처받지 않을 거리를 두고서라면, 그 사랑은 조금 덜 무서웠다.

나만 좋아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면, 특히 내가 그를 많이 좋아한다면

그 관계는 무서웠다.






20대 중반, 나는 스스로 돈을 내고 상담을 받았다.

어쩌면 아버지에게서 끝내 얻지 못한 답을 상담자에게서 찾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내 마음을 흔드는 모든 것 속에서

나는 늘 실망을 두려워했다.

내겐 사랑과 배신이 같은 말이었다.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믿었던 만큼, 기대했던 만큼 더 깊이 상처받고, 그래서 다음 관계 앞에서 발걸음을 망설이게 되는 일.

가까울수록 상처도 더 깊게 남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담자로서 내 패턴을 돌아보면,

그 신념이 여전히 내 안에서 불쑥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브런치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쓴 작가님과 마음을 주고받았고, 그녀는 내게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나는 또 두려움을 느꼈다.


내 마음 가까이에 오는 것을 반기면서도,

내 안에서는 이미 가시가 돋아나고 있었다.






상담자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뒤틀린 신념을 알아차리고

변화하려는 사람이기에 상담을 한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 과정 위에 서 있다.

내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오래된 믿음.

“사랑은 곧 배신으로 이어진다”는

단번에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은 이런 나를 인정하려 한다.

괜찮다는 경험이 조금씩 쌓이고 있으니,

그 믿음이 옅어질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려 한다.






사랑이 두렵다는 건, 사실 여전히 사랑을 갈망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산조각 난 사랑을 조심스레 맞춰가며 내가 원한 사랑을 세상에 건네려 한다.

언젠가 누군가도, 각자의 조각을 이어 붙이며 사랑을 건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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