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cloud temple in Beijing, 2024
'장춘진인 구처기' 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들어보셨다면,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신필'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김용의 작품,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를 통해서였을 것입니다. 김용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짧게 소개하자면, 김용은 홍콩의 일간지 '명보'의 주필로 활동했던 언론인입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드높여 준 것은 바로 그의 무협소설들이었는데요, 워낙 재미있어 덩사오핑이나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도 즐겨 읽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 3억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적판인 '영웅문' 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대표작인 사조영웅전의 경우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임에도 2024년에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을 만큼 아직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조영웅전 한 작품만 보더라도, 드라마로 촬영한 것만 8번 이상이고 영화로도 촬영했으니 그 인기는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김용 소설은 그 문학성으로도 높이 인정받아, 교과서에 실리거나 김용의 소설을 연구하는 학문이 생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중성과 문학성 모두를 만족시킨 그의 소설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의 소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역사적인 인물과 자신이 창작한 허구의 인물을 절묘하게 버무려 사건을 진행시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사조영웅전의 경우 주인공인 곽정과 황용은 허구의 인물이나 곽정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칭기즈 칸이나 그의 아들 툴루이, 곽정의 스승 제베 등은 모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입니다. 심지어 소설 후반부 곽정, 황용과 함께 양양성을 방어하는 장수인 여문덕조차도 실존 인물이죠. 이렇게 실존 인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사조영웅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원명교체기를 배경으로 한 '의천도룡기'에서는 주원장이나 명나라의 개국 공신인 서달, 상우춘 등을 등장시키며 청 강희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녹정기'에서는 주요 인물로 아예 강희제를 직접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사조영웅전에서 주인공 곽정의 사부 격이자 조력자들로 등장하는 '전진칠자' 또한 강력한 무공을 사용하는 도사들이기 때문에 실존 인물로 보이지 않으나, 사실 모두 실존 인물들입니다. 무림 최고수로 그려지는 왕중양 또한 실존 인물이죠. 전진칠자가 모두 실존 인물이니, 전진칠자 중 가장 강한 무공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장춘진인 구처기' 또한 당연히 실존 인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손에서 장풍을 쏘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술을 했을 리는 없으니 소설 속 구처기의 모습은 허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존 인물 구처기, 그리고 전진칠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현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그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장춘진인 구처기는 유의미한 행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다름아닌 칭기즈 칸을 만나 1년 정도 그를 보좌했기 때문인데요, 이 때의 기록은 제자 이지상(이 사람도 김용의 소설 신조협려에 등장합니다.)이 '장춘진인 서유기' 라는 이름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구처기는 당대의 명망 있는 도사로, 칭기즈 칸의 초청을 받아 현대의 아프가니스탄까지 가서 그를 만납니다. 칭기즈 칸은 과거 수많은 권력자들이 원했던 것, '영생'의 비결을 묻습니다. 과거 진시황이 도사들에게 불로불사의 비결을 물었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죠. 하지만 구처기는 칭기즈 칸의 예상과 전혀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애초에 불로불사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고, 다만 오래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며 무의미한 살생을 삼가야 한다고 답변합니다. 칭기즈 칸은 오히려 구처기의 이러한 대답을 귀중히 여겨, 1년 정도 자신의 옆에 두고 이런 저런 조언을 구합니다. 구처기는 불필요한 살생을 금할 것을 강조하여 많은 살생을 막았다고 알려졌는데, 훗날 청나라의 건륭제도 이러한 구처기의 일화를 '일언지살', 즉 한마디 말로 살생을 막았다고 하며 칭송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칭기즈 칸의 곁에 머물던 구처기는 다시 연경, 오늘날의 베이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곁에 머물며 도움을 준 보답으로 구처기가 이끌던 전진교에 면세 혜택을 주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김용의 작품을 읽은 분들이라면 재미를 느끼실 텐데요, 첫 번째는 소설에서 무림의 문파로 묘사되는 전진교가 실제 종교 교단으로서 존재했다는 점일 것이고 두 번째는 몽골족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으로 그려진 전진교가 칭기즈 칸으로부터 면세 혜택을 받을 정도로 후대받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연경으로 돌아온 구처기는 '태극궁'을 하사받아 이 곳에서 전진교를 포교하게 됩니다. 전진교는 당시 대중적인 도교와 달리 영생에 집착하지 않는 교단이었다고 합니다. 태극궁은 구처기의 호를 따 '장춘궁'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고, 마지막에는 '백운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백운관이 오늘날에도 베이징 서부에 남아 있는데요, 이 백운관을 오늘의 두 번째 여행지로 찾았습니다.
백운관 입구에서 가장 놀란 것은, 이 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관광지로 지정되어 있고 입장료를 받기는 하지만, 여권을 따로 검사하지도 않습니다. 이 곳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광객이라기보다는 정말 이 도관에 참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교는 종교의 이미지보다는 '신선'등의 이미지가 강한 반면, 이 백운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찾는 사찰처럼 수행자가 있고, 참배를 하러 온 참배객들이 향을 사르고 절을 하는 공간입니다. 특히 무협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하얀 도복을 갖춰 입고 머리 상투를 틀어 올린 수행자들, 혹은 도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현대 중국 한복판에서 도사들을 보게 되니 굉장히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다른 관광지들과 달리 백운관은 앞서 둘러본 백탑사와 마찬가지로 관광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욱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무협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고나 할까요.
백운관에 들어서면, 건너갈 수 없게 되어 있는 다리가 하나 보입니다. 다리 아래에는 물이 흐르지는 않고, 아래에 왠 커다란 엽전과 종이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작은 건물에서는 10위안에 가짜 동전 50개를 바꿔 주는데요, 이 동전을 던져 엽전이나 종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다리는 와봉교라고 부르는데, 전진교의 창시자이자 구처기의 스승인 왕중양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왕중양은 8년간 활사인묘 (그렇습니다. 신조협려에서 주인공 양과와 소용녀가 지내던 활사인묘입니다.)에서 수행 끝에 도를 깨우쳤다고 하죠.
백운관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전각이 있고, 전각 앞에는 큰 향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향로에서 향을 사르거나, 전각 안에 들어가 절을 하며 참배를 합니다. 날이 덥고 불이 있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참배를 하는데, 젊은 사람들도 많이 보입니다. 홍콩의 황대선사에 가면 향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다행히 백운관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각각의 전각에는 전진교와 관련있는 사람들이나 도교의 신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두 개쯤 전각을 지나면, '노율당'이라는 전각이 나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영어 설명을 읽어보고 있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곳의 원래 이름이 'Seven true saints hall'이라는 것인데요, 김용 소설에 등장하는 전진칠자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얼른 한문을 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보입니다. 단양자 마옥, 담처단, 유처현, 구처기, 왕처일, 학대통, 손불이까지. 김용의 소설 세계를 누비던 왕중양의 일곱 제자들은 이곳 베이징에서 참배객들의 참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각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으며, 전각마다 수행자인 도사들이 앉아 있다가 참배객이 들어서면 큰 그릇을 가볍게 쳐 징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냅니다. 사실 소설 속에서 수행자이자 종교인으로서 원숙한 인격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희로애락을 거침없이 표현하던 전진칠자의 모습이 생각나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노율당을 지나면, '구조전'이 등장합니다. 구조전이 바로 구처기를 모신 사당입니다. 전진칠자 중 가장 명성이 높기는 했지만, 왜 구처기를 모신 전각이 이 백운관에서 가장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사실 소설과 달리, 전진칠자는 각자 자신의 교파를 만들어 나갑니다. 구처기 또한 '용문파'라는 일종의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 용문파의 거점이 된 도관이 바로 이 백운관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개파조사'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이죠. 다른 파벌을 특별히 이단으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으니 왕중양의 일곱 제자를 모두 모셨고, 그 중 자신들의 직계 조사인 구처기를 별도로 가장 좋은 곳에 모신 셈입니다. 사실 이 구조전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실제 구처기가 생을 마감한 '처순당'이 바로 이 구조전입니다. 여담으로, 구처기의 용문파가 득세하여 전진교를 장악하자 전진칠자의 일원인 학대통이 아예 따로 나가 교단을 차렸는데, 역시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화산파입니다. 이 구조전 내부에는 장춘진인 구처기가 칭기즈 칸을 만나기 위해 서역을 여행하는 내용이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도교의 여러 신인 태상노군, 문창군 등을 섬기는 사당들이 구조전 좌우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사찰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향을 사르는 모습이나 도사들의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이라 한번 와서 볼 만하다 느껴졌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김용의 소설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소설 속에서 마치 '전투력 측정기' 같이 그려지던 괄괄한 도사 구처기의 실제 모습, '구조사' 로서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참배받는 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감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광지라기보다는 도교 사원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은 백운관. 김용의 무협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사찰과 또 다른 도교 도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도관이니만큼 '도사'들을 만날 수 있는데요, 옆으로 돌아다니다 보면 도사들의 생활 구역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문 안으로 들여다 보는 정도) 저희는 식당으로 보이는 곳을 살짝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학교의 급식실과 비슷한 식판 부딪히는 소리, 식기 씻는 기계 소리와 냄새가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로장생의 단약을 먹는 신화 속 도사와 달리, 아무래도 식판에 단체급식을 하는 모양인데요,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모로 신화나 소설 속의 인물들이 우리 곁에 실제로 존재했거나,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복잡한 베이징 관광지들 중 백탑사와 함께 아주 한적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