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응사 in Beijing, 2024
우리나라에서도 절에 가면 대부분 탑이 있습니다.
절에 있는 탑이라고 하면 석가탑과 다보탑을 떠올리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탑은 세부적으로 보면 각자 개성이 있지만, 크게 보면 대부분 사각형의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이징에 있는 사찰들은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탑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요, 바로 둥근 모양을 하고 있는 백탑입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부터 이 백탑 양식이 등장하여 거의 천년간 다양한 형태로 건축되어 왔습니다. 수도 베이징에도 그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여러 개의 백탑이 있는데요, 가장 유명한 것은 북해공원에 있는 백탑과 오늘 소개할 묘응사의 백탑입니다. 묘응사는 이 백탑이 워낙 유명해서, 일명 백탑사라고도 부릅니다.
묘응사는 자금성이나 경산공원, 천안문과는 약간 거리가 있습니다. 특히 왕푸징 인근에 숙소를 잡은 사람이라면 천안문 광장을 지나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요, 이 날 오전에 디디추싱을 불러 타고 가면서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사이 도로를 처음 지나갔습니다. 처음 본 천안문과 자금성의 크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반면, 이 백탑사는 상대적으로 한적한 골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백탑이 만들어 내는 경치가 좋아 인근 골목에는 예쁜 카페들도 많이 들어와 있다고 해요.
입구에서부터 백탑이 보입니다. 백탑사 내부에서는 사실 이 백탑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합니다.
월요일 오전에 방문했더니 아주 한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에 이화원에서 수 많은 인파에 뒤섞여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이제서야 비로소 여유있게 여행을 하러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렇게 사천왕상이 서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사천왕상과는 조금 다른 양식을 띄고 있습니다. 보통 사천왕상의 경우 각자 맡고 있는 방위와 이름에 따라 들고 있는 기물이 일정한데, 묘응사의 사천왕은 우리나라에서 보던 사천왕과는 들고 있는 기물이 조금 달랐습니다. 같은 동아시아 사찰이라 비슷해 보이면서도 서로 분명 다른 지점이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사찰 내부에서 더욱 강하게 다가옵니다. 유목민족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높게 솟은 솟대와 걸어 놓은 색색의 천. 세계테마기행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면 보통 라마교 사원에서 이렇게 장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마교는 우리가 티벳 불교라고 부르는 불교의 일파입니다. 사실 무협지 많이 보신 분은 '서역의 라마승' 같은 류의 묘사를 종종 접하게 되는데요. (보통 악역인 경우가 많죠) 의외로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이 가장 넓은 불교의 일파입니다. 티벳 지역은 물론이고, 몽골 자치구나 한반도와 인접한 동북 3성까지 유목민족이 거주했던 지역에 폭넓게 퍼져 있을 뿐 아니라 부탄, 네팔, 인도 등 티벳 인접 지역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한 갈래이나, 우리나라의 대승불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라마'는 위대한 스승인 '구루'를 뜻하는 말이며, 현대에는 '라마교'라는 말보다는 티벳 불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고 합니다.
원나라 뿐 아니라 청나라의 황실도 이 티벳 불교의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건륭제는 자신의 아버지인 옹정제의 사저였던 옹화궁 자체를 시주하여 절로 만들었는데, 이 옹화궁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외국인 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명소로 유명합니다. 옹화궁 방문기는 별도로 다시 적어 볼 계획입니다.
사찰에는 중심을 따라 세 개의 전각이 위치하며, 가장 안쪽에 유명한 백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심 전각들 중 가장 앞쪽의 전각에는 이렇게 백탑의 계보도와 그 구조에 대해 해설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데요, 백탑은 그 연대별로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탑의 모형 뿐 아니라, 베이징 일원의 다양한 백탑들의 사진을 모두 모아 놓아 굉장히 충실한 전시를 갖추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들을 다녀왔는데, 묘응사의 백탑 관련 전시는 규모는 살짝 작고, 진귀한 유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어지간한 특별전 수준 이상으로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다만, 대부분 중국어라는 사실.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번역기를 돌려 가며 읽어볼 만 합니다. 워낙 처음 접하는 문화라 그런지 그냥 그림만 봐도 흥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전각의 내부입니다. 일반적인 사찰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큰 특이점이 하나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찰의 모습과 달리, 묘응사의 전각들은 앞뒤로 모두 문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처럼 불상 뒤로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불상 뒷편, 그러니까 건물 뒷쪽 통로에도 이렇게 작은 천수관음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인기는 이 쪽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QR코드가 일상화 된 중국답게 시주도 QR코드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묘응사 백탑은 일명 '아난가', 영어로는 Arniko 라는 사람이 건립한 것입니다. 이렇게 백탑 앞에는 아난가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중국인이 아닌 네팔 사람입니다. 네팔 사람이 어떻게 베이징까지 와서 이 거대한 백탑을 설계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당시 중국이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난가는 1260년 중국으로 들어와, 40년간 원 제국을 위해 일했습니다. 다만 이 백탑은 네팔인인 아난가가 설계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당시 중국의 양식에 따라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아난가는 이 백탑만 관여한 것은 아니었고, 다양한 원나라의 사업에 기여하며 네팔의 양식들을 도입하기도 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인물은 네팔과 중국 양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중심 전각 외 오른쪽 전각에서는 아난가와 네팔, 중국의 관계에 대한 별도의 작은 전시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전시공간 중 유일하게 에어컨이 나오는 공간이라 둘러보기 좋습니다.) 이 외에도 일반적인 기념품점 외에 네팔의 전통 양식이나 기념품을 별도로 판매하는 공간이 있었구요. 네팔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안쪽 건물에는 베이징을 여행하다 보면 어디선가 항상 마주치는 이름, 건륭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눈에 띕니다.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다른 불상들과 달리 별도의 유리 케이스로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륭 시절 만들어진 불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이 백탑은 1979년경에 대대적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복구 과정에서 건륭제가 하사한 각종 유물들이 함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추가적으로 건륭제가 필사한 불경이 같이 나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가장 마지막 전각을 지나면, 드디어 백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만, 이 백탑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제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백탑은 내부에도 공간이 있으나, 보존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들어가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거대한 백탑의 크기를 짐작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우리나라 탑과 동일하게, 백탑의 내부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다만, 사각형을 유지하는 우리나라의 탑과 달리, 백탑은 전체적으로 원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백탑을 두 바퀴 정도 천천히 돌면, 속세와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며 동시에 일상과의 단절이라는 여행의 기분이 제대로 느껴집니다. 사실 천단이나 자금성 같은 곳은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많아 이런 기분을 느끼기는 어려웠거든요.
나오면서 기념품 가게를 잠깐 들렀습니다. 아까 잠깐 소개했던 아난가의 전시관 맞은 편의 측면 건물입니다. 이번 중국 여행에서 크게 느낀 것이, 의외로 중국 관광지의 기념품이 잘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그넷 같은 것이 굉장히 만듦새가 좋았습니다. (대신 가격이 비쌉니다. 왠만한 유럽 관광지 마그넷 수준)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급 레스토랑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영어를 잘 하는 분이 이 묘응사 기념품 판매점 점원이었다는 사실. 심지어 호텔 컨시어지 데스크 분들보다 영어를 잘 하시더라..
묘응사 백탑은 밖에서 봐야 그 모양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여러 가지 예쁜 카페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제가 방문한 곳은 묘응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카페입니다. 이름부터가 이 풍경을 노린 '백탑의 빛' 이었습니다.
백탑을 멀리서 감상해 보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둥근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저는 어딘지 모르게 청자나 백자 항아리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묘응사 백탑은 현존하는 백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인데요, 규모 역시 가장 거대합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굉장히 이국적인 모습이라는 느낌과 동시에 상당히 친숙하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독특하게 생긴 불탑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이국적이게 느껴졌고,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형태 자체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건축을 보면,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이 건축물을 설계한 '아난가'는 이 건축물이 얼마나 보존되리라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불심을 담아 이 탑이 영원히 빛나기를 바랐겠지만, 그는 승려가 아닌 건축가였으니 현실적으로 건축물의 수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유지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건축물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당시 백탑을 둘러싸고 있었을 원나라의 황궁과 당시의 시가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이제 주변에는 다양한 카페가 들어서 중국 현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백탑은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나는 동안 변함이 없었는데, 주변의 모습은 아난가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앞으로 백탑이 또 천 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천 년 후의 백탑 주변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거대한 유리 덮개 같은 것으로 이 백탑 자체를 씌워서 보존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백탑의 빛' 카페는 총 3층, 간단한 식사까지 가능한 브런치 카페였는데요, 저희는 너무 더웠던지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시그니처라는 백탑 디저트를 주문했습니다. 자리에서 QR로 주문하면 가져다 주는 방식입니다. 바깥 테라스에도 자리가 있고 내부에도 자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깥 테라스에서 주문을 했는데, 앉아 있자니 더운 열기에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 자리를 안쪽으로 옮겨도 되냐고 물으니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여 자리를 옮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테라스에서 백탑과 함께 사진을 찍고, 커피와 디저트는 안으로 들어와 즐깁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는 '얼음 가득' 옵션이 있는데, 이것을 선택해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수준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옵니다. 일반 옵션을 선택하면 커피에 얼음 몇 조각 정도 들어간다고 해요. 더운 날씨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시원한 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카페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백탑 디저트. 크림으로 백탑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만듦새가 생각보다 정교합니다. 백탑을 바라보며 먹으니 더욱 느낌이 새롭습니다. 생각보다 맛있기도 했구요.
재미있는 것은 탑 안에 들어가 있는 젤리. 크림만으로 만들면 영 맛이 단조로울 테니 넣었겠습니다만, 마치 보수공사 중 탑 내부의 유물을 발견한 것 같은 재미를 줍니다.
번잡하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그 여유를 한가로이 만끽한다는 의미로서 이번 베이징 여행에서의 첫 여행지는 바로 이 곳, 백탑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