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Palace in Beijing, 2024
배운전 뒤로, 이화원의 상징과도 같은 불향각이 보입니다. 불향각은 생각보다 제법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무더운 날씨에 지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불향각에 오르지 않으면 분명 후회가 남을 테니 올라가 보기도 합니다. 건륭 당시 9층 석탑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8층까지 건설하였으나 건륭제가 돌연 마음을 바꿔 지금의 불당으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 건물은 역시 서태후 당시에 복원한 것입니다.
불향각 입구까지 올라가면, 곤명호와 만수산이 빚어내는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꼭 올라가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불향각 내부에는 여러 개의 팔과 머리를 가진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만 볼 수 있으나, 높이가 5m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실 들어가서 볼 수 있다면 더욱 감회가 남다르겠으나, 들어갈 수 없다 보니 사실 불상보다는 밖의 경치에 더욱 눈이 갑니다.
불향각을 내려와 다시 장랑을 걸어 서쪽 끝에 다다라 북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무신 관우를 모시고 있다는 첨성관을 지나게 됩니다. 원래는 관우의 조각상이 있었으나, 열강이 약탈해 가 이후 복원할 때는 조각상 대신 위패를 모셨다고 합니다. 뒤로는 얕은 산인 만수산 일원을 산책할 수 있는 길입니다. 오래 된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정취와 그늘 덕분에 무더운 날씨에도 걷기 좋습니다. 가다 보면 하나씩 정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까지 복원할 여력은 없었는지 훼손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불향각 뒤로는 거대한 복원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건륭 연간에 지어진 티베트 사원인 사대부주라고 합니다. 청 황실은 티베트 불교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의 상징이나 사원들을 이 베이징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자금성에 인접한 황실 정원인 북해공원에도 티베트 불교의 상징인 백탑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대형 백탑이 있는 백탑사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 사대부주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나누어지는데, 역시 화재로 훼손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서태후 시절에 복원한 것은 아니고 1980년경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역시 그 규모가 상당하여, 완전히 복원되고 나면 이화원의 또 다른 볼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사대부주를 지나 내려가면, 강남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같은 소주가, 쑤저우지에가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강남 소주의 풍경을 옮겨놓은 것인데요, 이화원 하면 떠오르는 곤명호의 물이 만수산을 돌아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소주가는 마치 작은 테마파크 같은 느낌으로, 이화원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공간입니다. 전면의 호수와 산 뒷편까지 모두 사찰이나 황제의 거처가 있는 공간인데, 뒷편에는 강남의 저잣거리 풍경이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강남의 풍경을 사랑한 건륭제의 작품입니다.
건륭제는 재위기간 동안 세번이나 쑤저우에 방문했다고 하는데요, 이 강남 특유의 저잣거리 풍경이 퍽 마음에 들어 이화원에도 조성했다고 합니다. 황제는 마치 일반인이 된 마냥 이 곳에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흥정도 해 가며 일종의 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정말 상인들이 들어온 것은 아니고, 궁의 환관이나 궁녀들이 상인을 연기했던 것이죠.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비빈들도 이를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얼마 전까지 이 곳에서 음식이나 차를 판매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방문했을 때는 따로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덕분에 점심을 굶어야 했거든요.
이 소주가에서 큰 배를 타면, 아까 모터보트를 타고 돌았던 곤명호의 중심에 있는 남호도를 지나 17공교 인근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 그냥 북궁문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동문 근처에 있는 이화원 박물관을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쉬워 다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배를 타고 나아가니 정말 더욱 더 강남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곤명호가 인공 호수이니, 이 물길까지 모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일 텐데요, 새삼 이화원의 그 규모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아까 눈으로만 보고 지나갔던 17공교입니다. 17공교는 다리의 교각이 촌 17개라서 지어진 이름인데요, 다리의 난간에 장식되어 있는 사자상이 특히 유명합니다. 사자상은 모두 544마리나 되는데, 모두 조금씩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죠.
그 옆으로는 동으로 만든 커다란 소, 동우가 있습니다. 동우는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인데, 과거에 서양 열강은 이 동우의 소문을 금으로 만든 소가 있다는 것으로 잘못 전해듣고 이화원을 약탈할 때 금소를 찾기 위해 난리를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런 면에서 별로 가치가 없는 동우는 무사히(?) 보존되어 오늘날에도 곤명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화원 동궁문에서 살짝 밑으로 내려오면, 이화원 박물관이 보입니다. 이화원 박물관은 대부분 청나라 당시의 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었는데요, 서태후의 생활과 관련된 전시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당시의 것만 전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시대별로 다양한 의자, 화분, 장식품 같은 것들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의자와,
서양에서 수입해 온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 장식용 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눈을 잡아 끈 것 중 하나는 피아노였는데요, 당시로서 대단히 귀한 악기였을 테니 황궁의 높은 사람, 혹은 높은 사람을 위해서 연주되던 피아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최근에 중국 여행을 위해 즐겨 본 중국 드라마 '연희공략' 에서도 강희제의 서양 악기를 수선하여 건륭제 앞에서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피아노도 그런 역할이었겠지요. 연주하던 사람은 간데 없고, 피아노만 덩그러니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서양 스타일의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해당 유물들이 민국 시기에 어떻게 전시되어 있었는지를 사진을 통해서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서양 스타일의 유물들은 그 생김에서 예상할 수 있듯, 중국에서 제조된 것이 아니라 서양을 통해 수입한 것들입니다.
대부분 서태후를 위한 선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서양의 문물을 보고 서태후는 기뻐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런 모양의 장식품들은 지금의 눈으로 보기에도 저 주름 잡힌 모양을 세공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태후가 이러한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사이, 청나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선물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화원이라는 거대한 공간, 지금의 눈으로 보기에도 믿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거대한 이 공간을 재건하는 사이, 청나라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청 왕실의 사치스러운 풍조는 건륭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강희제, 옹정제 등은 모두 유목민족의 소박한 기풍을 이어 받아 대제국의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소박함을 가지고 황실을 운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강건하게 만든 제국을 물려받은 건륭제 또한 기나긴 치세 중 상당 기간을 소박한 건전 재정을 유지하며 통치했으나, 말년에는 예술품에 심취하는 등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이 이화원 또한 최초로 조성한 것은 건륭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세계적인 대 제국이었던 청나라의 국가 재정 규모로 볼 때, 건륭제의 사치는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화원을 조성하고, 소주가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청 제국이 영원할 것을 자신하며 곤명호에 석방을 세워도 '될 만 하니까' 세웠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서태후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의 국력과 재정이었음에도, 건륭제보다 더 크게 이화원을 증축하는 등 사치를 벌이게 됩니다. 물론 그 사치의 결과는 이화원 자체와 이화원 박물관 내부의 수 많은 유물로 남아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는 있으나, 이미 망국의 길로 가고 있던 청나라를 완전히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결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