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Palace in Beijing, 2024
이화원.
앞뒤 설명이 없다면 왠지 오래된 중국집 이름 같지만, 이화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청 황실의 별궁입니다. 영문명으로는 'Summer Palace'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여름궁전이라고 하니 작년에 방문했던 비엔나의 '쇤브룬 궁'이 떠오릅니다. 역시 중세와 근대를 수놓았던 대 제국인 합스부르크도 정궁인 호프부르크 궁 외에, 여름 궁전인 쇤브룬 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또한 비슷하게, 정궁인 자금성 근교에 여름 궁전인 이화원을 가지고 있었죠.
물론 이화원 외에, 이화원보다 더 화려했다는 원명원을 비롯하여 여러 시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격동의 시절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거나 약탈당해 훼손되었습니다. 사실 이화원도 영국, 프랑스 군 등에 의해 상당 부분 훼손되었으나, 서태후가 엄청난 자금을 들여 이화원을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천하의 서태후가 복원한 지금의 모습도 사실은 예산 부족으로 원래 모습을 다 복원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니, 이화원의 원래 모습은 지금보다 더 화려했을 것입니다.
이 이화원을 비롯하여, 자금성, 천단 등이 베이징 중심부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 그 이외에 베이징의 세계유산으로는 명나라 황제들의 릉인 명 13릉, 고대로부터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졌던 만리장성이 있습니다만, 같은 베이징 내에 있다고는 하지만 자금성 등과는 약 40km가까이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베이징 시는 하나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그 면적이 우리나라의 강원도에 육박할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면,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에서 베이징 자금성 일대까지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데,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외곽에서 단순 중심부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1시간이 걸리는 정도이니, 그 규모가 새삼 놀랍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날은 폭염이 지속되어, 체감온도가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였습니다. 사실 이화원을 여행 이틀차 아침에 찾은 이유도, 그나마 체력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방문해 보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왕푸징 거리에 있는 호텔에서 이화원까지 택시로 대략 40분 정도, 택시비는 45위안이니까 9천원 정도 나왔습니다. 확실히 택시비는 저렴한 편입니다. 물론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더 저렴했겠지만, 날이 너무 더워 가급적 이동할 때는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편안하게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간단한 기능성 티셔츠만 걸치고 있었음에도 5분만에 티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강렬한 햇살에 비해 습도는 낮은 편이라, 개인적으로는 서울의 더위보다는 견디기 수월했습니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이화원은 6시 30분부터 문을 여는데 주요 전각들은 일반적인 관람 시간대인 08:30분 내지 9시부터 문을 연다고 합니다. 공원 자체에 입장하는 표는 30위안이지만, 이화원 박물관이나 불향각까지 입장하는 통합 티켓은 60위안입니다. 60위안이면 12,000원이니까, 중국 관광지 치고는 저렴한 편은 아닙니다. 아침에 일찍 입장해야 수 많은 패키지 관광객을 피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저희는 9시 30분경에 입장하여 한적한 시간에 돌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화원은 거대한 호수인 쿤밍호 위에 만수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쿤밍호를 따라 산책로와 각종 건축물들이 위치하고 있는데요. 특히 만수산 위에 대부분의 건축물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화원 하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진이 바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 위의 거대한 전각인데, 이 전각이 바로 사진에서 거대하게 보이는 불향각으로 만수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호수가 남북으로 긴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쪽 문으로 입장하면 불향각 일대까지 제법 먼 거리를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아무래도 걷기에는 쉽지 않은 날씨라 처음부터 만수산에 접근할 수 있는 동문으로 입장하기로 했습니다. 베이징 관광청에서는 이화원 관람 코스로 이 동궁문으로 들어가 인수전, 곤명호, 옥란원을 관람한 후 약수당, 장랑, 석방, 쑤저우가를 보고 석방에서 배를 타고 나오거나 북궁문으로 나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동궁문에는 이렇게 이화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광서제의 글씨라고 합니다. 이 이화원은 서태후와 함께 광서제에 얽힌 이야기도 많은 곳입니다. 다만 서태후가 자신의 화려한 영달을 위해 이화원을 건설하고 원 없이 누리다 갔다면, 광서제는 서태후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가 결국 이화원에 유폐당했으며, 아마도 서태후 또는 우리에게 원세개로 알려진 위안스카이에 의해 독살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화원 앞에는 큰 해태상이 하나 서 있는데, 이 해태는 자금성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입장하는 시점에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할 수도 있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는 설명이 상당히 충실하나, 아무리 들어봐도 북한 발음의 아나운서가 안내해 줍니다. 사용하는 용어도 우리가 쓰는 단어들과는 약간 괴리가 있는데요, 이를 감안하고 빌리시면 좋겠습니다.
동궁문으로 입장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바로 인수전입니다. 인수전은 평생 정사를 돌보는 것을 멈출 수 없던 황제를 위하여, 여름 행궁에 설치된 일종의 사무실입니다. 자금성에는 정사를 돌보는 세 개의 대형 전각이 있듯, 여름 행궁에도 정사를 돌볼 수 있는 전각을 하나 설치한 것이죠. 다만 광서제는 이 곳에서 서태후의 수렴청정을 받기만 했고, 유폐당한 이후에는 이 인수전에 아예 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인수전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은 인수전 앞의 용과 봉황입니다. 중국에서 용은 당연히 천자를 상징합니다. 봉황은 통상 황후, 태후 등을 상징하구요. 그런데 이 배치는 무언가 기묘합니다. 당연히 천자인 용이 중심에 오고, 천자의 곁을 지키는 봉황이 옆에 있어야 할텐데 봉황이 당당히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서태후가 황제인 천자의 권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실 황제는 이 인수전에 발걸음조차 하지 못할 만큼 권세가 약해져 있었기는 하지만, 이렇게 드러내 놓고 자신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을 만큼 서태후의 힘과 권력이 강력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수전 앞에는 기암괴석이 뜰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뒤쪽으로는 광서제가 유폐되었던 장소인 옥란당이 있습니다만, 워낙 덥고 사람이 많아 밀려가다 보니 방문하지 못해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옥란당 자체는 아름다운 사합원 건물이라고 하며, 광서제는 여름에는 이곳에, 겨울에는 현재 중국 고관대작들의 거처인 중난하이에 유폐되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광서제 당시 청나라는 이미 망국의 기로에 접어든 상황이었음에도, 서태후를 비롯한 궁중의 생활은 대단히 호화로웠다고 합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식사인데, 광서제나 서태후는 청나라의 가장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건륭제 시절보다도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고 합니다. 다만 유폐된 광서제의 식탁에는 수십 가지의 호화로운 요리가 나오기는 했으나, 광서제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요리는 같은 음식을 계속 내와 실제로는 상해서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베이징 중심으로만 그럴듯할 뿐, 각 지역은 열강의 침략에 의해 부패하고 몰락해 가는 청나라의 현실과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일화입니다. 광서제는 자신이 먹고 싶은 요리를 내오라고 명령했지만, 서태후가 황제의 검약을 강조하며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광서제는 그야말로 꼭두각시로 불행한 삶을 산 셈이죠.
인수전을 지나 발걸음을 옮긴 곳은 덕화원입니다. 덕화원은 별도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앞서 통합 티켓을 구매했다면 그냥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태후가 광서제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조차 먹지 못하게 하며 검약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덕화원을 관람한다면, 굉장한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화원을 처음 건축한 건륭제 당시에는 덕화원이 단순한 연회장이었으나, 경극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서태후는 이곳을 본인이 좋아하는 경극 공연장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덕화원 한가운데에는 경극 공연을 위한 3층짜리 무대인 대희루가 있는데, 중국 최대 규모의 전통 경극 공연장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경극 보는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물을 분사해 비가 오는 효과를 연출하는 인공강우 장치도 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무대였다고 하니, 서태후의 호화로운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대의 관객석이라 할 수 있는 현락전은 40여명의 관객만을 수용할 수 있어, 당연히 서태후의 측근들만 함께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덕화원 내부에는 전각 내에 다양한 유물들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덕화원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그 유명한 장랑입니다. 장랑은 천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대한 회랑입니다. 회랑 바깥으로 나서면 거대한 곤명호가 보이는데, 곤명호 앞에 서자 서늘한 바람이 지친 마음을 달래줍니다. 이 이화원이 왜 여름 궁전으로 이용되었는지 알 것 같은데요, 과거 서태후가 뱃놀이를 즐겼다는 이 거대한 곤명호는 놀랍게도 인공 호수입니다.
건륭제 시절부터 존재하기는 했으나, 서태후가 당초 크기보다 두 배 이상으로 확장하며 이름을 곤명호로 바꾸었습니다. 변변한 중장비가 없던 시절에 이 거대한 호수를 사람의 손으로 파서 만들었다니 새삼 놀라우면서도 이 호수를 만들이 위해 희생되었을 수 많은 인력의 애달픔이 이 호수에 녹아 있는 듯 합니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아마 이 호수의 물 만큼이나 많지 않았을까요.
이화원이 약탈당한 후 서태후는 엄청난 거금을 들여 이화원을 복원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했다고 합니다. 당장 베이징이 적의 손에 넘어가는 마당에, 황실의 별궁을 복원하는 것 보다 군비 증강에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서태후는 이 거대한 호수에서 해군 훈련을 하면 된다는 논리로 밀어 붙이며 해군의 예산을 이화원 재건에 사용합니다. 사실 '곤명'이라는 이름도 이 때 새롭게 붙인 것인데요, 한 무제가 곤명이라는 호수를 만들어 수군을 육성했다는 고사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실제로 해군 훈련을 하기는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내륙인 베이징에서 전함을 끌고 전쟁터인 텐진까지 가는 사이에 청 해군이 궤멸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서태후만이 배를 띄워 뱃놀이를 즐기던 거대한 곤명호는 이제 누구라도 배를 띄워 뱃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베이징 여행에서 이러한 감정을 여러 번 느꼈는데요, 대단히 거대한 공간이 주는 위압감은 황제의 권위를 온 몸으로 웅변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쉽사리 짐작하게 합니다. 거대한 곤명호나 높이 솟아오른 불향각은 물론이고, 높은 하늘과 평평한 땅 사이에 단 하나의 건축물만 보이도록 만든 천단, 역시 넓은 돌바닥을 깔고 그 위로 우뚝 솟은 자금성의 전각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숙하고 장엄합니다.
비교해 보자면, 서양의 건축물들은 화려한 형태를 갖추더라도, 그것은 다른 건물 또는 건물 그 자체와 서로 어우러지는 느낌입니다. 화려하기로 이름난 베르사유 궁의 경우에도, 궁만큼이나 화려한 정원은 사람의 손으로 정갈하게 가꾸어져 전체 공간이 조화롭게 하나의 테마로 채워져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베이징의 건축물은 단일 건물의 크기로 공간을 압도하기보다는 거대한 여백을 사용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백은 하늘일 수도 있고, 호수일 수도 있으며 인위적으로 조성한 돌바닥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캔버스를 만들듯 주변을 모두 없애버리고, 가운데에 주제를 정해 그려냅니다. 사실 그 주제가 되는 건축물은 엄밀히 따지면 그렇게까지 큰 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변에 그와 비교할 만 한 다른 것이 없기에 그 자체로 덩그러니 홀로 존재하며 거대한 인상을 주는 듯 합니다.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는 듯 말이죠.
그런데, 그런 서태후의 호수나 황제의 제단인 천심석에 이제 일반인, 과거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그야말로 천민까지도 모두 와서 배를 띄우고 발을 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시대가 바뀌었다는 극적인 외침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 장엄한 건축물들이 주는 위압감은 아직도 그대로지만, 과거 홀로 존재하던 시절에 비하면 현격히 약해져 있습니다. 바로 그 밑에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가고 또 관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천자의 권위는 없으며, 모든 사람이 천자의 권위를 감상하고 심지어 체험해 볼 수 있는 것. 이것이 현대 중국 정부가 강조하는 중국이 자랑하고 싶은 모습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비단 중국 정부와 중국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파리올림픽 개막식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가 갇혀 있던 콩시에르주리에서 등장한 것은, 프랑스 정부가 중국 정부처럼 프랑스는 시민혁명의 전통을 가진 시민의 나라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날이 너무나 더워, 뱃놀이를 먼저 해 보기로 했습니다. 소형 모터가 달린 배는 한 시간에 200위안. 보증금은 600위안입니다. 보증금조차도 위챗페이를 이용할 수 있으나, 알리페이밖에 없었던 저희는 현금을 냈습니다. 표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어 나중에 보증금을 어떻게 돌려준다는 얘기인지,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중국의 사기는 아니일지 다소 걱정했습니다만, 배를 반납할 때 직원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매표소로 데려가 400위안을 도로 돌려 주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배를 빌려 타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기억했는지 신기하면서도,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중국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아무래도 내가 너무 선입견이 강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선입견이 맞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모터가 달린 배기는 하지만 그렇게 빠르지는 않기 때문에, 이 넓은 곤명호를 호반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만수산 쪽을 먼저 돌아본 다음, 17공교로 유명한 남호도를 돌아보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장랑 앞쪽으로 배를 타고 돌아본 셈입니다. 배를 타고 서쪽 끝까지 가자, 왠 돌로 만든 배가 하나 보입니다.
이것이 장랑 끝쪽에 있는 돌로 만든 배, 석방입니다. 이 배는 서태후 시기가 아닌, 건륭제 시절에 조성된 배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때가 타고 쇠락한 모습이 보이기는 하나 배 자체는 대단히 화려하며, 마치 서양의 배와 같은 장식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나라와 같은 시기의 파리나 비엔나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장식입니다. 사실 이 석방을 처음 만들 때는 배의 윗부분인 누각을 나무로 만들었는데, 아편전쟁 당시 이 이화원이 훼손된 후 복원 과정에서 누각도 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 굳이 뱃놀이를 하는 호수에 이런 돌로 만든 배를 띄웠을까요?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임금을 배로, 백성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물은 배를 떠받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 배를 전복시키기도 하죠. 임금에게 백성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건륭제는 이러한 고사에 도전한 것이 아닐까요. 중화 사상 최강, 최대의 제국을 통치하던 건륭제는, 물이 결코 배를 엎지 못하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절대로 뒤집어지지 않도록 단단한 돌로 배를 띄워 자신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앞으로 영원히 이 배는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청나라는 강성할 것이다 하는 의미였겠죠.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작은 모터보트는 물가에 떠 있는 석방까지 아무런 장애물 없이 근접할 수 있어 부딪히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배를 호수의 남쪽으로 몰면, 멀찍이 보이던 17공교까지 다가가 볼 수 있습니다. 17공교 아래를 배로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배를 반납하고 발걸음을 옮기니, 낙수당이 보입니다. 낙수당 역시 건륭제가 건립한 건물로, 서태후의 침실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세상의 사치를 모두 즐길 수 있었던 서태후의 침실이니만큼 이화원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라고 하며, 중국에서 최초로 전기등이 가설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고 있어 밖에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담으로, 서태후는 비교적 근대 사람이라 전기등과 같이 근대의 문물을 사용해 볼 수 있었는데요, 위안스카이로부터 자동차를 선물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이 자동차를 보고 말이나 사람이 필요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고 감탄했다고 하지만, 운전기사가 자신의 앞에 편안히 앉아 운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무릎을 꿇고 운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첫 운행에서 사고가 났고, 이후로 서태후는 자동차를 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문물이라도 그를 뒷받침하는 사고가 없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길게 이어진 장랑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장랑은 실제 길이 728m로 정말 거대한 회랑입니다. 이 회랑의 천장을 보면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들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지, 서유기 등의 그림도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요, 그림이 모두 14,0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이 정말 대단합니다. 중간중간에는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들은 각자 사계절을 상징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회랑이 산과 호수가 맞닿는 곳에 건설하다 보니, 일직선이 아니고 경사도 져 있다는 사실인데요, 건축가는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하기 위해 이 네 개의 정자를 절묘하게 배치했다고 합니다.
살짝 방향이 틀어지는 곳, 혹은 높낮이가 변화하는 곳에 이 정자를 설치하여 이 곳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쭉 뻗은 일직선처럼 느끼게 한 것이죠. 생각해 보면, 서양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축의 천재들이 보여준 예술에 가까운 기술적 요소들이 동양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동양의 천재들은 대부분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죠. 특히 박물관에 가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요, 특히 대만 고궁박물원에 가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인지 믿기 어려운 상아조각들이 있는데, 이 조각들의 작가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이 이화원을 설계한 건축가도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장랑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배운전이 나옵니다. 배운전은 만수산 중턱에 건설된 이화원의 정전입니다. 위치상으로도 이화원 건축물들의 가장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원래 이 배운전은 건륭제가 황실 사찰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가장 좋은 위치에 있으니 황제보다 위세가 높았던 서태후는 이 곳을 자신의 거처로 사용하려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낙수당으로 거처를 옮겼지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서태후는 처음 이 곳에서 밤을 보내고 병이 났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원래 부처를 모시던 곳에 사람이 들었으니 병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낙수당으로 거쳐를 옮겼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이 배운전은 서태후의 생일 때 축하인사를 받기 위한 예식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서태후의 생일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서태후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듯, 기둥 하나하나마다 금칠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낙수당을 지나면, 이화원의 상징인 불향각으로 올라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