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 lake in Hangzhou, 2025
한국은 한참 추웠던 지난 겨울, 항저우와 상하이,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우전 수향마을이었습니다. 첫 번째 여정은 항저우. 항저우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 직항이 있어 편리하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작년 여름 베이징 여행과 달리, 중국의 무비자 정책으로 편하게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항저우는 베이징이나 상하이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여행지로 아주 매력적인 곳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항저우가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쑤저우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살고, 광저우의 음식을 먹고, 류저우에서 죽어라' 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옛날부터 아름다운 항저우의 풍경을 사랑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아마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청나라의 대표적인 황제인 건륭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강희제나 옹정제와 달리 풍류를 즐겼던 건륭제는, 아름다운 중국 남부의 풍경을 좋아하여 여러 번 순방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름다운 강남 풍경을 수도인 베이징에 재현하여 '쑤저우가' 를 이화원에 조성하기도 했죠.
풍경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항저우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서호입니다. 항저우 토박이라는 택시 기사는 이 서호의 풍경과 용정차가 항저우의 양대 자랑이라고 설명해 주기도 했습니다. 용정차 또한 이 서호 지역에서 나는 것을 최고로 치는데, '서호용정' 이라고 부릅니다. 숙소에 짐을 놓고, 바로 서호로 향했습니다.
겨울철이라 일찍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는데요, 그 덕분에 서호의 일몰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 때문인지 약간 앙상하기는 하지만 남쪽 지방답게 버들이 늘어져 있고, 큰 호수의 물결은 가볍게 일렁입니다. 추운 날씨임에도 포근한 느낌을 줍니다.
서호는 이미 진한 시기, 그러니까 거의 2천년 전부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또 농경사회인 당시에 맞게 수원지로서의 역할도 했지요. 이 서호를 보수하기 위해 고대인들은 여러 제방을 쌓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당나라 백거이가 쌓은 '백제'와, 북송 시기 소동파가 쌓은 '소제'입니다. 당초 목적은 치수공사였겠지만, 현대에는 이 제방들도 경관의 일부가 되어 서호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 전체를 놓고 보면 서호가 아주 큰 편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멋진 풍경 덕분에 많은 문인들의 작품에 등장하게 되었고,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중국 화폐 중 하나의 뒷면에도 이 서호의 풍경이 그려져 있구요. 김용의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도 서호는 낯설지 않은 지명입니다. 사조영웅전, 소오강호에서도 이 서호가 언급되고 녹정기에서는 이 서호의 유명 식당인 '루외루'가 잠깐 등장하기도 하니까요.
서호를 한바퀴 돌아보려면 전동차로 한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요, 시간만 충분하다면 걸어서 돌아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아마 한 서너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워낙 공간이 넓어 북적인다는 느낌은 크지 않았는데요, 호수를 산책하는 것이 참 여유롭고 좋았습니다. 중간 중간 상점들이 있어 먹을 것을 팔기도 합니다. 혹시 베이징에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스차하이나 이화원을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히 서호는 그 둘보다는 훨씬 여유롭고 고즈넉합니다.
해가 저물어갈수록 호수의 물도 같이 물들어갑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등은 고전적 중국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왠지 저 멀리서 사공이 강호의 협객을 태우고 나룻배를 저어 올 것 같지 않나요?
사실 서호 가운데에 있는 섬인 '삼담인월' 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신 서호를 한바퀴 돌아보는 유람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층에는 일반 선실이 있고, 2층에는 이렇게 여유롭게 앉아서 차를 마시며 서호를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차는 제법 값이 나갔지만, 여행의 첫 여정이니만큼 여유롭게 서호를 관람하고 싶어 차를 마시며 앉아서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지만, 이런 점에서는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돈을 내고 음료를 주문한 승객이 유람선의 더 좋은 장소에서 경치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상하이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기는 하지만 1층에 발 디딜 곳 없는 수준의 인구밀도와 2층의 이 넉넉한 환경은 소위 '돈 더 낸 사람'에 대한 편의를 강력하게 보장한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배 위에서 본 서호의 풍경은 왜 수많은 문인들과, 황제가 이곳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2층은 차를 마시는 네 명이 사실상 독점할 수 있었는데요, 그 덕분에 여유롭게 서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차는 항저우의 자랑인 용정차였는데, 서호에서 용정차를 마시며 뱃놀이를 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항저우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호 인근에는 두 개의 큰 탑이 있습니다. 뇌봉탑과 육화탑인데요.
뇌봉탑은 977년, 송나라 시절 지어진 탑으로 사람을 사랑한 백사가 봉인되어 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사는 이 탑이 무너져야만 풀려날 수 있다고 전해졌는데, 이후 탑은 무너졌고 지금의 탑은 2002년에 다시 복원한 탑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백사가 있었다면, 이제는 오랜 속박에서 벗어났겠죠. 내부에는 복원되기 전의 주춧돌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인데, 서호의 풍경은 새로운 경험과 함께 편안한 휴식까지 제공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휴양지 리조트에서 느끼는 휴식이 아니라, 정말 중국 옛 그림 속에 들어가 그들의 여유와 평온함을 같이 즐기는 것 같은 의미에서요. 조명과 석양이 어우러지며 마치 불이 난 것 같았습니다. 산세의 수려함과 함께 이국적인 경치가 더해져 정말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중국의 문인들도 은퇴하거나 속세에서 물러나면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은거하는 삶을 꿈꾸곤 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은퇴하고 이런 곳에 살면서 매일같이 이 풍경을 감상하며 산책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으니까요.
해가 완전히 저물면, 서호의 풍경은 또 한번 변합니다. 환한 조명이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과할 정도로 많은 조명을 밝혔다 싶지만 잔잔한 호수와 수목의 조화가 그 조명들을 부드럽게 표현합니다. 서호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지만, 대신 내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전통 복장을 하고 서호의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요, 일부는 아예 반사판까지 준비해서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전기와 조명이 등장하면서 새롭게 나타난 풍경.
이 남쪽의 풍경을 사랑했던 건륭제가 만약 이 풍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또 서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소동파를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은 또 어떻게 이 장면을 묘사했을까요.
사실, 항저우는 멋진 풍경만 존재하는 도시는 아닙니다. 중국의 빅테크 기업으로 잘 알려진 '알리바바' 가 항저우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최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AI인 '딥시크' 또한 항저우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중국은 정책적으로 스마트 시티를 육성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곳이 이 항저우입니다.
하지만 서호에서는, 옛날 문인들이 즐기던 그 정취와 고즈넉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마트 시티의 첨단 기술보다는 옛 사람들이 즐기고 읊었던 서호의 아름다운 풍경과 여유를 만나는 것이 보다 여행의 목적에 맞게 느껴졌습니다. 하루 종일 거닐고 싶은 풍경을 가진 서호는 천 년을 훌쩍 넘는 시간 속에 계속 존재하며, 수 많은 사람에게 영감과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소동파처럼 멋진 시를 지어 서호의 풍경을 노래할 재주는 없지만, 눈과 마음에는 충분히 그 정경을 담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