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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r 29. 2024

하숙 이야기

나의 하숙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조금은 이른 나이에 시작된 하숙은 나의 아버지가 품으신 큰 뜻에서부터 태동한다그러니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것이 글의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한다

 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의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과 싸우며 생존하셨다.’고 했다조금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 것이다보따리장사를 하며 보름씩 집을 비우고 겨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던 할머니의 노고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린 동생들이 느꼈을 배고픔과 불안은 공포에 가까웠을 것이다

 생존할 수 있다면 성공하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꿈꾸던 경제적 성공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고성공의 신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다음 세대인 나에게로 전가되었다맏이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의 성공 과업을 물려받은 것이 내심 싫지 않았다

 80년대남아선호가 극심한 때는 아니라 딸이라도 당연히 교육받고 존중받는 시절이기는 했지만 궁핍한 시골마을 형편은 도시와 달라 그래도 아들이라며 여자애들은 은근히 차별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하지만 아버지는 이제 막 태어난 남동생보다 맏이인 나에게 조금 빨리 희망을 걸고 싶으셨나보다어릴 때부터 맏이가 잘되어야 집안이 흥한다.’며 도시의 중학교 진학을 위해 6학년 말에 전학을 시키셨다

 아직도 쌀 두가마니와 함께 차에 실려 도시로 가던 그 날이 가끔 생각난다이른 새벽이었고 낡은 트럭 앞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서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덜컹거리는 차 뒤 칸에는 허연 쌀가마니가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아직도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남는 것은 어린 딸을 낯선 곳으로 보내며 편치 않았을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믿고 싶은 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가족을 떠나간다는 것이 먹먹한 그리움으로 솟아오르는 눈물이 되고내 평생의 정서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하숙을 하는 집은 먼 친척 분이 아름아름 아이들을 모아 운영하고 있는 산 밑의 가정집이었다지금은 천지개벽을 해서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도심과는 떨어져 있어 감나무에 까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논둑길을 걸을 수도 있는 정겨운 마을이었다

 옹색한 집에는 방이 네 칸 있었고주방 하나에 욕실 하나가 있었다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따뜻하게 불이 들어오는 입식 부엌이었다추운 겨울 입김을 후후 불며 연탄을 갈던 어머니의 부엌과는 너무도 달라서 한동안은 주방에 들어갈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나곤했다또 그곳은 어린 딸을 맡기며 애타는 마음으로 등에 업어다 내려놓은 아버지의 무거운 쌀가마니 두 개가 한동안 놓여있던 곳이기도 하다

 안방은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시집간 딸이 맡긴 손자들이 지냈고옆방에는 대학생 아들과 그 아들의 친구가덧이어 지은 방 하나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자 아이들 세 명이 하숙을 했고제일 작은 방에는 그 집 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하숙생 두 명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놀라운 것은 방의 크기와 사용 인원의 수에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방에 객식구가 한 명 더 늘었으니 언니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고그때부터 서러운 나의 하숙생활이 시작되었다

 얘 이걸 여기에 두면 어떻게 하니가뜩이나 방이 좁은데…….”

 속옷은 바로 바로 빨아야지 이렇게 꿍쳐두면 안 돼.”

 불 좀 꺼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재수를 하는 주인집 언니 기분에 따라 하루는 해가 반짝했다가 이내 먹구름 가득 끼고 우르르 쾅쾅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그럴 때마다 사무치게 그리운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수도꼭지를 돌려놓은 듯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얘 좀 봐무슨 말을 했다고 이렇게 우니누가 보면 엄청 구박하는 줄 알겠네.”

 종국에는 맘대로 울지도 못하고 방에 있을 수도 없어 화장실 가는 척 하며 밖으로 나와 주방 한 쪽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아버지의 쌀가마니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다 잠이 들곤 했다결국 주방 한 쪽 쌀가마니 놓인 자리는 내가 하숙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됐다     

 어쩌다 집에 들를 수 있는 토요일이 되면 오전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부모님과 동생들이 있는 집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입이 귀에 걸릴 판이었다지금 생각하면 곰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는 부모님 걱정하실까봐 하숙집에서의 어려움을 크게 내색할 수 없었다엄마에게 투정을 부려봤지만 아버지 역정 내시고 걱정하실 것이 두려워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그리고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 오후가 되면 멀리 버스가 보이는 순간부터 눈물이 줄줄 흘렀다우는 나를 홀로 차에 태워 보내는 엄마도 눈물을 훔치며 거친 손을 흔들어 주셨다.        

 하숙집 생활도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고학교생활도 차츰 익숙해져 갔다다들 제 갈 곳으로 가서 일하거나 공부하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그때까지는 아주머니와 꼬맹이 둘 뿐이었다자연스럽게 아주머니 일도 도와드리고 아이들과도 놀아주며 마음이 안정되었던 것 같다몇 해 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어마어마한 양으로 음식을 차리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나와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바로 우리 하숙집 아주머니가 딱 그러했다김밥을 한 번 싸면 백 줄이 기본이다특식으로 자장면이나 카레라이스가 나오는 날이면 내 머리통만한 대접에 한 가득씩 음식이 담겼고잡채는 당연히 커다란 양푼이 넘치도록 위태위태하게 버무려졌다중국집 주방에서나 쓰일 법한 큼지막한 팬에는 연일 멸치와 어묵이 볶이고커다란 들통에는 국이 펄펄 끓었다유쾌한 아주머니의 주방은 나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전해주었다.     

하숙집 주방에 잊지 못할 추억은 하나 둘이 아니다주인집 아저씨는 경찰공무원이었다체격도 커서 주방에 들어올 때면 늘 꾸부정하게 걸었다언니들 기분이 심상치 않은 날에는 으레 주방으로 향했고 아버지의 쌀가마니가 놓였던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마음의 안정도 찾았다그날도 그런 날이었다쪼그려 잠을 자고 있는데 잠결에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얘는 왜 맨날 여기서 이러고 자?”

 그냥 둬요지 편한 곳에서 자느라 그러는 거지 뭐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기나 해요.”

일어나기도 민망해서 자는 척하고 있었지만 아저씨가 쩝쩝거리며 먹던 것이 소고기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박봉에 많은 아이들이 버글거리는 상황에서 가족 모두가 소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나름대로 생각해낸 꾀일 터였다하지만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혼자만 소고기를 먹는 아저씨 모습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언니들은 차가운 편이었지만 오빠들은 어린 나를 잘 챙겨주었다야간 자율학습과 주말에도 학교에 나가서 입시를 준비하는 상황이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가끔 오빠들이 라면도 끓여주고 떡볶이도 만들어 주었다별 맛없는 떡볶이도 라면스프를 털어 넣으면 먹을 만해진다는 것을 오빠들에게 배웠다특히 나하고 가까운 동네에서 유학 온 오빠는 동향 사람이라고 나를 더욱 살뜰히 챙겨주었다

 한번은 엄마가 볼일을 보고 가시는 길에 하숙집에 들린 날이 있었다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데 엄마가 있어 얼마나 좋던지 냉큼 달려가서 엄마를 안았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는 주방에 들어서서는 설거지부터 시작을 하더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아주머니도 하지 말라고 만류하는데 엄마는 구지 남의 집 식모처럼 몸을 재게 움직이며 허드렛일을 하였다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싫던지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 닫았다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운 형편 생각해서 하숙비를 적게 받아준 아주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엄마의 아량이었을 것이다또 그 집에 머무는 딸이 조금이라도 따뜻한 대접을 받았으면 하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주신 부모님 덕분에 오늘도 나는 묵묵히 나의 길을 걷고 있다눈물로 시작된 하숙생활도 함께 어우러져 지내준 여러 사람들 덕분에 잘 마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이다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밥 먹고 무심하게 툭 던진 한 마디로 위로를 전하는 내 곁에 사람들이 결국 희망이고 삶인 것이다고단한 삶에 지친 매일의 연속이지만 우리 곁에 누군가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고삶은 이어질 것이다이 어려운 시기에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도 참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 짧은 글을 적으며 몇 번을 울었다마을 어귀부터 산 밑에 덩그마니 놓여있던 하숙집 담장까지 차근차근 따라 걸어간다옹색한 마루를 지나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던 주방 한 쪽에 쌀가마니 놓인 자리도 보이고언니들과 투닥거리던 좁은 방도 이제 정겹다마음이 후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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