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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 구입(3)

낙미아스, 게임을 시작하지

1평짜리 사무실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오너가 왔습니다이름이 Mr. Nacmias였는데 전 그냥 '낙미아스'라고 불렀거든요. 원래 어떻게 읽는지는 아직도 몰라요. 사전을 찾아보니 포르투갈어라고 나오기는 하는데 저랑 있는 동안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할튼 미스터 낙미아스가 왔어요. 영화에서 보 미국인 특유의 인상이었습니다. 특별히 기른 건 아닌데 면도를 며칠 안 해서 뺨까지 정말 넓고 빽빽하게 자란 수염을 가진 남자였어요. 혹시 영화배우 론 펄먼 아세요?

론 펄먼 (출처 : 구글)

영화 퍼시픽림에서 그 카이쥬 체 거래하는 암시장 두목 역할 맡았던 배우거든요. 아니면 영화 헬보이에서 헬보이요. 그 사람처럼 생겼어요. 수염 덥수룩해서. 근데 머리숱은 없었고요. 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할튼 그 론 펄먼 닮은 미스터 낙미아스가 와서 이제 본격적으로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했죠.


처음에 19,000달러, 정확하게는 18,995달러였는데 제가 그랬어요. 995 이거 뭐냐고. 진짜로 말을 그렇게 했어요. '홧쯔 디스?'. 미국에 보면 CARFAX라는 사이트에서 유료로 제공하는 중고차 이력서 같은 게 있거든요. 주인 몇 번 바뀌었고 어디 수리했고 그런 리포트가 있는데 중고차 업체에서 윈도우 프라이스를 적은 차량 이력서에 그 리포트를 붙여서 자료로 써요. 거기서 가격표에 적어놓은 995를 펜으로 지운 거죠.

시작과 동시에 사라진 995. 사본이다.

찍찍 그으면서 "아돈..아돈..(I don't..)" 제 딴에는 '이런 비겁한 우수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떼고 시작하자'는 말을 해야 하는데 적절하게 설명을 못하겠어서 그냥 중얼중얼하면서 그었어요. 그래도 대충 알아듣더라고요. 여기부터는 대화를 그대로 옮겨볼게요.


나 : 어 미스터 낙미아스 반가워, 나 흰색 시에나가 필요한데 너무 비싸더라고.

낙미아스 : 들었어. 여기 카 리포트가 있어, 컨디션이 참 좋고 어쩌고 18,995달러고 블라블라.

나 : 여기 995? 이건 뭐야? 아니야 이건..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으로 그음)

낙미아스 : 어? 어.. 그래 그럼 18,000달러야.

나 : 응 그런데 너무 비싸거든. 나는 풀 옵션은 필요 없고 저거보다 싸고 옵션 적은 하얀 차 좀 보여줘.

낙미아스 : 그런 건 없는데. 흰 차는 저거 한 대뿐이야.

나 : 그럼 깎아줘.

낙미아스 : 예산이 얼마인데?

나 : 몰라 몰라. 그런데 저건 너무 비싸.


깎아달라 안 된다 실랑이하는 동안 시간은 가고. 사실 시작과 동시에 목표 금액 달성이었기 때문에 안 깎아줘도 살 거였거든요. 그래도 한 번 찔러본 건데 예상외로 반응이 말랑하더라고요. 피자 먹고 마르코 사무실에 돌아갔을 때부터 한 2시간 지났나 봐요. 그리고 2,000달러를 깎았어요처음에 지워버린 995달러 포함해서요.


낙미아스 : 알았어 그럼 17,000달러로 하자. 윈도우 프라이스에서 거의 2,000달러를 내린 거야.

나 : 안 돼. 비싸다니까. 나는 그 돈도 없고 그보다 옵션이 너무 좋아서 돈이 아깝단 말이야.


여기는 진심이었어요. 풀옵을 흥정으로 17,000달러까지 깎았으니 깡통은 훨씬 저렴할 거 아니겠어요?


낙미아스 : 그럼 오세이를 보는 게 어때? 그것도 아주 훌륭한 차야.

나 : 아냐. 나는 흰색이 필요해. 오디세이 흰색은 없다며. 아까부터 옵션은 딱 그거 하나만 이야기했잖아.


흥정을 하다가 대상을 바꾸는 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갈아타는 순간 지금까지 들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새로운 대상에서 기껏해야 생색내기 식으로 찔끔 내린 가격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거든요.


낙미아스 : 그럼 흰색 시에나 17,000달러에 가져가라니까?

나 : 아주 좋은 가격이야 고마워. 그런데 돈이 없다니까?


둘 다 벽 보고 얘기하는 느낌인데 미스터 낙미아스는 어쨌든 차를 팔고 싶고 저는 사야 하니까 협상이 결렬되지는 않더라고요. 할 얘기가 없으면 그 이는 컴퓨터로 잡무를 보고 저는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하다가 좀 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그랬어요.


그로부터 1시간 후 -


낙미아스 : 알았어 16,000달러에 가져가. 이게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 가격이야.

나 : (쏠깃)

낙미아스 : 여기 모니터 화면 좀 봐.


미스터 낙미아스가 자기 앞에 있는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주더라고요. 무슨 재고관리 시스템 같은 건데 지금 흥정하고 있는 차량 가격이 나와 있었어요.


낙미아스 : 여기 15,500달러 보이지? 이게 우리가 매입해 온 가격이야. 여기서 리뉴얼도 하고 그러면 16,000달러에 줘도 우리는 손해나 마찬가지야.

나 : 알았어 그럼 15,500달러에 하자.

낙미아스 : 아니 15,500달러에 주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입해 온 가격이 15,500달러라고.

나 : 글쎄 그건 알겠. 좋은 차고 좋은 가격이고 깎아줘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충분하지가 않아.

낙미아스 : 예산이 얼마인데? 거기 맞는 차를 추천해 줄게

나 : 아냐. 예산은 나도 모르겠고 할튼 저 차가 마음에 들어. 저걸 가져가야겠어. 그러게 왜 풀옵을 보여줬어.


- 그로부터 1시간 후 -


미스터 낙미아스는 인내심도 많고 사업 수완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낙미아스 : 그럼 이렇게 하자. 돈이 부족하면 내가 이자를 받지 않을 테니까 돈을 12개월 동안 나눠서 내도 좋아. 내가 너를 믿고 보증 없이 이자도 없이 그냥 할부로 해줄게.

나 : 그래주면 난 고맙지. 정말 고마운 제안이야. 그럼 15,500달러를 12개월로 나눠서 내면 되는 거지?

낙미아스 : ...

나 : ...

낙미아스 : 알았어 15,500달러. 정말 마지막이야. 여기 매입가를 봐. 손해 보고 주는 거야.


결국 3시간에 걸쳐서 3,500달러를 깎았습니다. 그때 환율로 500만 원 가까운 돈이네요. 좀 더 해보고 싶었지만 아들 유치원 픽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어려웠어요. 게다가 첫 1시간 동안 2,000달러를 깎았는데 그다음 1시간에 1,000달러, 그다음 1시간은 500달러라 시간당 효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어요.


미스터 낙미아스가 할부 계약서를 쓰려고 서류를 주섬주섬 준비하길래 됐다 하고 일시불로 계약했습니다. 당연히 처음부터 돈은 있었고 이제 와서 '사실은 돈이 있었다'라고 해서 도로 가격을 올려 받을 건 아니니까요.


그 자리에서 계약금 500달러를 냈고 차량 번호판이 발급되면 차를 가지러 다시 오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차를 중고로 사면 기존 번호판이 그대로 따라오는데 미국은 다른가 보더라고요. 국토부에서 차 번호판을 우편으로 보내주면 그걸 가져와서 차에 달고 가는 겁니다.

당시 계약서 사본. 잔금 15,000달러

고생해서 구입한 차는 아주 좋았어요. 2년 뒤에 되팔고 나올 때까지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았네요. 산지 3개월 만에 바퀴에 영 좋지 않은 곳에 못이 박혀서 타이어를 교환할 때가 있었는데 미스터 낙미아스가 자기네 정비소에서 공짜로 갈아줬어요.


앞으로 나오겠지만 장장 10,000km 대륙 횡단 여행도 함께했고 저희 가족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준 소중한 차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미스터 낙미아스가 저에게 보여준 매입가가 진짜라고 믿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 사냥한 것 치고는 나름 득템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가족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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