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문과라 죄송합니다.’ 줄여서 ‘문송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이자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된 현재, 그리고 과학지상주의가 될 미래에도 여전히 회자될 씁쓸한 말이다. 적어도 문과인 나에겐 그렇다.
수학을 못하는 자의 비참한 말로가 문과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학을 못해도 교과서 앞장에 있는 집합은 잘 푼다는데, 나는 집합도 많이 헤맸다. 수학에 흥미도 없었지만 재능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윤리가 좋았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대학교를 철학과로 진학했다. 철학이 뭔지도 모르고 '뭐, 윤리랑 비슷하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진학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나는 다시 한번 수학의 벽에 부딪쳤다. 현대철학의 거장인 버트란트 러셀과 그의 제자이면서 현대 논리학의 탑티어인 비트겐슈타인을 영접한 나는 수학을 못하면 철학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수학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대 철학의 거목들이다.) 수학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서나 마주쳐야 하는 고약한 놈이었다.
수학을 못하니 과학은 더더욱 흥미가 없었다. 물리학은 수학기호 같은 것들 투성이고, 화학은 뭐하는 과목인지조차 몰랐다. 그나마 생물학과 지구과학은 만화책에서 본 것들(공룡, 동물, 태풍 같은 것들)이 종종 등장하니 그나마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흥미를 바탕으로 30대가 되어서 종의 기원을 읽었고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다. 그래서 생물의 기원은 하나이고 다양한 종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를 거듭했으며, 자연선택을 당하는 진짜 주인공은 유전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리학은 적어도 양자역학은 뭔지 알아야겠다 싶어서 다양한 영상매체를 통해 슈뢰딩거의 역설,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사실을 겨우 암기했다. 화학은 뭐… 마약제조에 활용된다 정도? 지구과학은 날씨예보 아님? 이런 수준에 머물러 있다. 수학은 여전히 어렵지만 확률과 통계는 좀 알아야겠다 싶어 공부하고 있지만 기초가 부실하니 공든 탑도 쌓지 못하겠더라.
결국 아직도 ‘문송합니다.’를 외치는 나의 모습을 보며 그냥 익숙한 인문학 공부나하지, 왜 어려운 공부를 하는지 안쓰러울 지경이다. 축구선수가 농구를 못한다고 죄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불쌍한 문과 나부랭이는 수학과 과학을 잘 알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문과의 최고봉인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으나, 일반적인 인문학은 이제 과학적인 지식을 근거로 삼지 않으면 한낯 사견에 해당되는 주장으로 비치기 일쑤다. 아니다, 문학에도 과학이 필요하다. 인간군상을 사실적으로 전달할때, 과학적인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인문학이 과학적인 지식을 근거로 설득력을 얻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하는 문과라면 과학 공부를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이런 의견에 대해 유시민작가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인문학과 과학의 고유영역이 다르므로 인문학이 과학의 시녀로 전락하는 일은 없다는 쪽이다. 다만 인문학은 과학을 알 때 비로소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실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과학을 활용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나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인문학도 공허하다는 입장이므로 좀 더 인문학의 위기를 절감하는 입장이라 볼 수 있겠다.
요즘 나오는 책들을 보면 성공과 관련된 책, 돈 버는 것과 관련된 책, 자기 계발과 관련된 책들이 많은데 대부분 뇌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글을 쓴다. 그리고 심리학은 또 어떤가? 프로이트의 그늘을 벗어버리고 당당하게 과학의 한 분과로 인정받았지 않았는가? 경제학은 완전히 수학자들의 놀이터이고, 사회학은 통계를 모르면 발을 들일 수 없다. 그나마 남은 게 문, 사, 철인데, 문학,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철학은 요즘 영미철학이 대세라 논리학을 모르면 발을 붙이기 어렵다.(논리학은 쉽게 말하자면 언어로 된 수학이다.) 결국 인문학은 과학에게 대부분 점령당했거나 투항하는 형국이다. 이런데도 인문학을 하면서 과학을 등한시한다면, 도도한 과학지상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인문학도들은 익사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유시민의 신간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를 읽으면서 나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비록 인문학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명색이 문과생인데, 철학과 출신인데, 인문학의 위기를 방치한다는 것은 내 뿌리가 흔들리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오지랖이라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유시민 작가는 참 대단해 보인다. 과학을 공부해서 인문학과 연결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본인을 과학에 관심 있는 나부랭이 정도로 격하게 낮추는 겸손한 미덕도 대단해 보인다. 유시민 작가의 발 끝도 미치지 못하는 나는 어디에 얼굴을 들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진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까부는 것이 죄다. 유시민 작가의 책에도 언급된 파인만교수의 일화가 있다. 핵물리학의 거장들과 함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으며, 굵직한 물리학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그가 말하길 인문학자들은 건방진 바보들 같아서 같이 토론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냥 과학자도 아니고 파인만 정도의 사람이 말하는 것이니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는 것을 아는척하는 것은 죄다.
나는 대단한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문과생 나부랭이일 따름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헛소리를 떠벌리는 논쟁들은 극혐 하는 문과생이다. 철학과에서 내가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자기가 말하는 개념에 대해 정의할 수 없다면 그 개념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고로 사실적인 정의를 할 수 없는 개념들로 궤변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면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 옳다. 어떤 사람이 인문학을 배웠고, 토론과 논쟁을 즐기는데,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한 개념을 하나도 설명할 수 없다면 열에 아홉은 가짜라 봐도 무방하다.
어쩔 수 없이 문과생이 되었지만 내가 극혐 하는 문과생으로 남기는 싫다. 그래서 나도 이 세상에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을 좀 알아야겠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내 뇌의 데이터도 쌓여갈 것이고, 적어도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궤변론자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나는 양심적인 문과생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눈물을 훔치며 '코스모스'를 펼친다.
문송합니다. 칼 세이건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