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글을 쓴다는 건 어떤 행위일까?
나는 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소설이라 읽은 것들은 중학교 때 즐겨본 판타지소설, 고등학교 때 수능공부용으로 읽은 한국문학 짧은 것들(운수 좋은 날 등)이 전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놈으로 규정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나에게 리포트 잘 쓰기, 보고서 잘 쓰기, 논리적으로 잘 쓰기 정도의 행위로 인식됐다.
사실 일상생활을 하면서 글쓰기라는 것은 누구나 한다. 어린이도 일기란 것을 쓰고, 어른들도 경위서란 것을 쓴다. 정치인은 연설문이라는 것을 쓰고, 기업가는 사업계획서라는 것을 쓴다. 사무직은 어떤가? 글로 시작해서 글로 끝나는 일을 하지 않던가? 노동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생산직도 직급에 따라 작업일지를 쓴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문자를 아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잘하면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움직이게 하고,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글쓰기는 현대인에게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학업에 도움이 됨은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라는 행위가 그렇게 수단적인 가치만 있는 행위일까? 글쓰기라는 행위가 목적 그 자체로 인정되는 경우는 없을까?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티스토리의 글들을 방치하고 브런치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유는 티스토리에서의 글쓰기는 방문객을 늘려서 광고를 달고 수익을 창출하려는 수단적 글쓰기였고, 브런치는 솔직한 내 생각과 감정을 토로할 수 있는 글쓰기 그 자체가 목적인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목적이 되자 수단은 버려졌다. 글은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의 일환이었지, 돈을 벌려는 삿된 생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느꼈다. 모든 것은 목적이 수단에 선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처럼 철든 어른이 된 계기가 있다. 바로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고부터다. 박완서 작가가 쓴 자전적 일기형식의 에세이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고 난 후 글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아끼던 아들을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의 구렁텅이에서 써 내려간 글인데, 소설보다 문장이 강하고 힘이 있다. 자식을 잃고 신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작가의 심정은 어느 소설의 문장보다도 강렬하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죽여서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죽일 여지가 남아있는 신, 증오의 최대 극치인 살의(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中
이 책은 자식 잃은 어미의 처절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작가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절절한 어미로서의 감정이 녹아있고, 문득문득 드는 나쁜 생각들도 여과 없이 다 표현한다. 신을 그렇게 믿었건만, 20대의 창창한 아들을 데려간 신이 죽일 듯이 밉다는 작가의 심정은 사뭇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박완서는 아들의 죽음을 극복하진 못했다. 다만 수녀원에서 은둔하며 수녀들의 삶을 바라보며 다시금 신에게 질문한다. 어떤 이유로 자신의 아들을 데려갔냐고. 그러나 신은 대답해주지 않는다. 박완서 스스로가 갈구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수밖에 없다. 수녀들과의 조용한 삶 속에서 박완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던 박완서는 수녀라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수녀들은 억지로 손을 내밀지도, 끌고 가지도 않았다. 신과 함께 하는 삶 자체를 보여주며 박완서를 위로했다. 결국 신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박완서는 다시 신의 존재에 기대게 된다. 아들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가슴에 품게 된다.
이 책을 보면서 내가 놀란 점은 너무 선명하게 솔직한 글이라는 점이었다. '아들 대신 딸이 죽었다면, 이렇게 까지 슬프진 않았을까?'라고 고백하고 얼른 무서운 생각을 반성하는 장면이나, 딸이 무당이 된다고 걱정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자식을 잃었는데 뭐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 거리는 것이나, 어쭙잖게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꼴도 보기 싫었다고 말하는 부분들을 보면 얼마나 박완서가 이 책을 솔직하게 썼는지 알 수 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솔직했다.
작가도 밝혔듯 이 책은 한 많은 어미의 통곡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글이다. 그래서 일기 형식인 것이고, 정식 출판물로 쓰지 않고 성당잡지에 게재된 에세이로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박완서는 글을 쓰면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성인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나무라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이 책을 보며 나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글쓰기란 내가 나를 토해내는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나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있는 척, 멋있는 척, 아는 척하는 글쓰기는 정말 잘못된 글쓰기란 생각을 어른이 다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박완서는 ~하는 척하며 글을 쓰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사악한 것들까지 끄집어내어 글을 썼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솔직한 글쓰기였다.
그래서 나도 박완서처럼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박완서처럼 진정성 있는 솔직한 글을 쓸 재주가 부족한지도 모르겠지만, 내 안에 있는 생각, 감정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쓰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니 글을 쓰는 것이 편해졌다. 강아지들이 목줄을 풀면 힘차고 명랑하게 뛰어다니 듯 나도 솔직하게 쓰니 글 쓰는 것이 즐거워졌다. 나는 글을 통해 솔직한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글을 쓰다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박완서처럼 글을 쓰자. 내 안의 사악한 것들까지 꺼내어 솔직하게 드러내자. 부끄러울 것 없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나를 드러내는 목적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