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막장이 아니라 더 답답하다
막장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은 어이가 없고 답답해하면서도 재밌게 본다. 현실이 더 막장이라서 그런 건지, 막장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안심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막장 드라마에 환호하고 열광한다. 아침드라마나 저녁 뉴스 전에 하는 일일드라마가 아직도 지상파 시청률 1등 공신인 것만 봐도 그렇다.
막장 드라마의 공식 같은 게 있다면, 바람이나 불륜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꼭 보면 주인공들은 임자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이런 막장 속에서 주인공은 남이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 변호한다. 우리는 그런 주인공들에게 정당한 욕지거리를 날리면서 묘한 쾌감을 느낀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면서 막장 드라마의 사이다 맛이 그리웠다. 도덕적이고 지고지순한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현대인인 나에게 소화불량에 걸릴 듯한 답답한 것이었다. 임자 있는 여자 샤로테는 여우짓도 안 한다. 차라리 베르테르가 샤로테의 어장관리의 희생양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샤로테는 베르테르에게 꼬리 친 적이 없다. 정원의 한줄기 빛나는 아름다운 장미꽃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샤로테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저 예뻤고, 착했고, 매력적이었을 따름이다.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진 것도 잘못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 심취하는 예술가를 탓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것이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성경에 나와 있듯 도둑질과 간음은 동급의 범죄다. 그런 범죄를 당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 샤로테의 남편 알베르트에게는 베르테르를 내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미련 곰탱이 같은 알베르트는 샤로테와 베르테르가 남사친, 여사친 놀이를 계속하게 배려해 준다.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디에 있을까? 내 아내가 다른 놈팡이와 놀아나는데, 그 놈팡이의 정신상태와 건강을 염려하는 남편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이 책에서 알베르트의 존재는 답답함을 더한다.
베르테르도 착한 놈이다. 샤로테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에로스를 뺀 정신적 사랑을 추구한다. 물론 문득문득 샤로테의 앵두 같은 입술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어 오르지만 베르테르는 도덕관념을 가진 젠틀맨이다. 사랑하는 샤로테에게 남편이 있음을 절규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로맨티시스트다. 이러니 무작정 베르테르를 비난하기도 멋쩍다.
남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를 동정하는 여자,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를 배려하는 착한 남편, 이렇게 답답한 세명의 인간을 모아보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삼각관계의 슬픔으로 읽힌다.
사실 나는 대문호 괴테의 위명에 이끌려 이 책을 읽었다. 그래서 이렇게 유치한 사랑놀음 이야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요즘 중고등학생들도 이렇게 치기 어린 사랑은 하지 않는다. 순수하다면 순수한 사랑일 수 있겠지만, 또 이렇게 바보 같은 짓거리가 없다. 아니 임자가 있으면 포기를 해야지 자기 목숨까지 걸면서 사랑할 건 또 뭔가?
내가 감수성이 떨어진 늙은 아저씨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기대했는데, 희대의 망작 ‘클레멘타인’을 본 느낌이다.(괴테가 클레멘타인급은 절대 아니지만 내 감상이 그랬단 말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젊었을 때 읽었다면 지금의 느낌과 좀 달랐을까? 누구에게나 절절한 첫사랑, 짝사랑의 추억이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임자 있는 것은 탐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유명인이나 존경하는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는 현상인 '베르테르 현상'은 작명을 좀 바꿔야 할 것 같다. 베르테르는 그렇게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순수한 철없는 청년에 불과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