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유시민
고전을 읽는 이유는 결핍 때문이다.
아마도 2월 초였을 것이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독서삼매경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야심 차게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고전 10번 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2024년을 온전히 독서에 몰입하기로 결심한 나는 매일매일 필사일지를 작성하고, 하루에 한 권 책을 읽으며, 일주일에 고전 1권을 3 회독을 하는 어찌 보면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매일매일 책 한 권을 읽고 그에 대한 독후감을 쓴다는 것도 솔직히 버거운 일인데, 그 어렵다는 고전을 한 권당 10 회독을 하겠다니 일반적으로 세울 수 있는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름 독서도 꽤 했고, 머리가 완전히 멍청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노오~력'만 한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오~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그 말을 순수하게 믿은 사람은 죄가 없다. 나는 죄가 없다. 단지 순수했을 뿐이다.
'노오~력'은 배신한다. 반드시 배신한다. 무엇이든 '노오~력'만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은 뻥이다. 매일 한 권씩 읽겠다는 목표는 꾸역꾸역 해나가는 중이지만, 고전 10번 읽기는 처음 읽기 시작한 '코스모스' 1 회독에 정체된 상태이다. 고전이 주는 감동이 대단했지만, 그만큼 버거웠다. 마치 하와이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면 탁 트인 바다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와 온몸을 감싸는 해풍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게 하지만 계속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가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오는 느낌이랄까? 고전은 이런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고전을 읽으며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친밀한 태도를 고수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은 쉽게 접근해서 저자를 비판하며 도장 깨기 하듯 읽어야 재미가 더해지는 법인데, 고전은 범접할 수 없는 고수의 품격이 있어 쉽게 그러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계속 나보다 약한 상대만 찾아다녀서는 절대 고수가 될 수 없는 법, 일본의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설은 강자들을 쳐부수는 도장 깨기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나도 고전 읽기를 포기할 수 없다. 나도 고수가 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시민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 '글쓰기 특강'은 내가 필사를 시작하게 한 원동력을 제공했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내 젊은 시절과 중년에 접어든 지금의 생각을 이어주는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한 작가의 책만 탐독하는 것은 편식의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 들어 유시민 작가의 책을 몰아치듯 읽고 있지는 않다. 더러 피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고전 읽기에 상념이 깊은 이 시점에 한 권의 책이 내 레이더에 포착이 되고 말았으니 유시민작가의 고전 탐독기 '청춘의 독서'가 바로 그 책이다.
사실 나는 은근히 꼰대기질이 있어서 고전을 읽을 때도 고지식한 측면이 있다. 고전을 쉽게 읽는 방법은 간단하다. 요약서를 먼저 보면 편하다. 대부분의 고전은 먼저 읽어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요약서, 해설서가 존재한다. 그런 책들을 먼저 읽고 고전을 읽으면 내비게이션을 틀고 목적지에 도착하듯 편하게 고전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고전은 무릇 요약서를 보지 않고 그냥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꼰대이므로, 내비게이션을 끄고 굳이 안 해도 되는 지도를 펼치고 목적지로 향하는 생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도 일종의 고전 해설서라 볼 수 있으므로 보기가 꺼려졌다. 내가 세운 원칙보다 더 고집스러운 원칙이 없다고, 스스로 내 원칙을 깨는 것은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유시민 작가 특유의 세일즈에 넘어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쓴 거 별거 아니야,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을 거야. 한번 읽어봐.
거기다 내가 유시민 작가에게 영업당한 건 또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코스모스의 글귀가 '청춘의 독서' 머리말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의 명문장이라 볼 수 있는 '우리는 모두 별의 자식들이다.'라는 문장과 같은 의미의 문장이 등장한 것이다. 어쩜 이렇게 반가울 수가? '코스모스를 읽은 사람은 이런 문장을 쓰게 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미치니, '청춘의 독서'를 안 읽어 볼 수 없었다.
나의 육체는 코스모스를 운행하는 모든 별들과 같은 물질로 연결되어 있고, 정신은 문명사의 이정표를 세웠던 위대한 지성인들과 책을 통해 이어져 있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서 살아있는 문화유전자를 상속받았다. 그들이 했던 고민과 사색은 많든 적든 내 것이기도 하다.
-[청춘의 독서], 유시민 中-
'청춘의 독서'는 총 14권의 고전을 다룬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로 시작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끝나는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젊은 시절 읽었던 고전들을 50대가 된 시점에 다시 읽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개인적 서사가 담겨 있다. 젊을 때 읽었던 고전의 감동과 느낌은 나이 들어 읽어보니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그 당시 배움이 짧아 알지 못했던 것들도 새롭게 보이고, 경험이 부족해 느끼지 못했던 감정도 새롭게 몰려온다. '청춘의 독서'는 단순한 고전 해설서가 아니다. 이 책은 고전이라는 소품을 통해 유시민 작가의 개인 전기를 다룬 책이다. 삶을 관통하는 고전 읽기를 통해 작가는 삶의 궤적을 다시 그려본다.
아예 고전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전을 읽은 작가의 관점이 담겨있기에 각 고전들에 대한 짧은 설명과 작가의 해설이 있다. 다만 그 설명과 해설이 아니라 작가가 고전을 읽었을 때의 당시의 배경과 깨달음이 더 와닿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또다시 결핍을 느끼고 말았다. '아! 나는 왜 이리도 무지 했던가?'라는 탄복이 절로 나왔다. '죄와 벌'을 읽었으되 중심 주제인 '선한 동기는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를 잘 파악하지 못했고, '맹자'를 읽었으되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뿌리가 유교라면 진정한 보수주의란 '맹자'의 가르침에 뿌리를 둘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되묻지 못했다. '푸시킨'이나 '솔제니친' 같은 러시아 대문호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어 생경하기 그지없었고, 사마천의 '사기', 다윈의 '종의 기원'은 작가처럼 풍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심도 깊게 읽어보지 못했다.
각 챕터마다 내가 읽으며 느낀 것만 적어봐도 탄식이 절로 나온다.
1.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사이코 살인자 이야기 아니었음? 이렇게 깊은 주제의식이 있었다니.
2.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베트남전은 대한민국이 잘 살게 된 계기가 아닌가?
3.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가 이렇게 글을 선동적으로 잘 썼다고?
4. 맬서스, [인구론]: '인구는 기하급수적 증가, 식량은 산술급수적 증가', 이 논리로 빈자를 인위도태시켜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한 사람이 맬서스였다고?
... <중략>...
10. 다윈, [종의 기원]: 다윈이 굉장히 신중하게 쓴 글이 종의 기원이었군.
... <중략>...
14.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 실증주의가 맞는 게 아니었다고? 역사는 팩트 아닌가?
유시민 작가의 말대로 고전은 어디서 주워들은 풍문만으로도 아는 척이 가능하기 때문에 나 또한 직접 읽어보지도 않고 고전을 대충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니 나의 부족한 식견에 놀라울 따름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말하지 말라는 것이 철학이 내게 준 첫 번째 가르침이었는데, 술자리에서 까불며 고전에 대해 나불거렸던 과거를 떠올리니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청춘의 독서'는 고전에 대해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힘든 시절의 이정표를 제시해 준 것에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나에게도 그럴 날들이 오게 될 것인가? 어쩌면 나는 고전을 읽을 준비가 덜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읽는 고전이란 그저 그런 지식도서를 읽는 수준으로 평범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전이 내게 주는 삶의 위안이 있었나? 고전이 내 삶에 이정표를 제시해 준 적이 있던가? 나는 너무 날림으로 고전을 읽으려 한 것이 아니었나?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된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다. 내겐 타는 듯한 성장의 목마름만 있을 뿐이다. 고전을 읽으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내겐 절대적인 종교적 믿음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전을 읽는다. 목적은 다를지라도 고전을 읽은 후 보일 풍경은 같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다시 힘을 내 고전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