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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Mar 08. 2024

곰 같은 사람의 낭만적인 낚시 이야기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나는 낚시를 싫어한다. 낚시란 바다나 강에서 경치를 구경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기를 낚는 손맛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초보자에게 잡히는 고기라고는 피라미정도일 뿐, 참돔 같은 맛깔난 고기가 잡힐 리 없다. 그래서 낚시란 전문가의 영역이고,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한다. 추운 날씨에도 낚시꾼들은 바다로 강으로 고기를 낚으러 짐을 챙긴다. 분명 다른 쉬운 취미들이 많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낚시에 열광하고 손맛을 찬양하는 것일까?


고기를 낚는 일이 생업이라면 또 모르겠다. 어부의 삶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면 넋을 놓고 본다. 치열한 '체험삶의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생의 열기를 느낀다. 이른 새벽 다른 사람들은 다 자고 있을 시간에 어부의 하루는 시작된다. 검은 바다를 뚫고 나아가 어망을 던지고, 다시 힘겹게 어망을 들어 올리는 어부들의 삶에는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배에 고기를 가득 싣고 만선으로 귀가하는 어부들을 항구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따뜻하게 반겨준다. 어부의 만선은 어부만의 것이 아니다. 항구에 모인 사람들 전체의 기쁨이다.


고기를 낚는 낭만과 인생에 대해 우직하게 써 내려간 소설  


오랜만에 문학책을 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골랐다. 책을 읽으며 두 번 놀랐는데, 첫째는 책이 얇은 것에 놀랐고, 두 번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유명한 책이 이렇게 재미가 없는가?'라는 것에 놀랐다. 정말 재미없는 책이었다.


산티아고라는 할아버지는 어부다. 어촌에서 어부로 오랜 기간 살았다면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꼰대짓도 할만한데 어촌 사람들에게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멍청하고 순박한 사람일 따름이다. 다행히 산티아고를 따르는 착한 소년이 있는데, 이름은 마놀린이다. 마놀린은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산티아고의 유일한 친구이다.


산티아고는 몇 달째 고기를 잡지 못했다. 어부로서 자격미달이라는 점에서 어촌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기에 마땅하지만, 산티아고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늘 안 잡히면 내일 잡으면 되고, 내일도 안 잡히면 다음날 잡으면 된다. 그러다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그날그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산티아고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복장이 터지다 못해 가슴에 삶은 고구마를 한가득 먹은 것처럼 답답하다. 왜 어촌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무시하는지 알만하다.


매일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산티아고는 어느 날 자신의 배만큼 커다란 청새치를 만난다. 정어리 미끼로 살살 유혹해서 낚싯바늘을 물게 만든 산티아고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크기의 고기를 낚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인다. 낚싯줄이 끊어지기도 하고, 청새치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손이 베기도 한다. 낚싯줄을 사이에 두고 산티아고와 청새치는 장장 이틀에 걸친 사투를 벌인다. 그 과정에서 산티아고는 고기에 대한 동정심도 느끼고, 동질감도 느낀다. 나중에는 힘이 부쳐 고기가 나를 잡는 건지 내가 고기를 잡는 건지 모를 정신의 혼미함을 느낀다.  


결국 산티아고는 고기를 잡는 데 성공한다. 어촌을 통틀어 산티아고가 잡은 고기보다 큰 고기를 잡은 사람은 없었다. 기록적인 성공이었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 청새치가 흘린 피냄새를 맡고 상어 떼가 몰려왔다. 산티아고는 청새치와의 싸움에서 기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임에도 그는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인다. 작살이 부러지면 배 젓는 노로, 노가 부러지면 부러진 끝을 창살로 삼아 상어 떼를 물리쳤다. 하지만 상어들이 청새치의 살점들을 모두 먹어버렸다. 허무한 결말이었다. 산티아고가 어촌에 끌고 온 것은 살이 다 벗겨진 뼈만 남은 고기였다. 미놀린은 지친 산티아고를 울며 보살폈고 산티아고는 기특한 미놀린을 바라보며 단잠에 빠졌다. 산티아고는 상어 떼에게 패배한 자가 아닌 청새치에게 승리한 어부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사나이였다.


이것이 노인과 바다의 스토리이다. 늙은 어부의 고기잡이 일기에 불과한 이 이야기는 스펙터클 하고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는 요즘 드라마에 익숙한 나로서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낚시도 싫어하니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낚시 용어들도 생소했고, 속세를 초월한 듯 고기를 낚는 노인의 모습이 생경했기에 더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노인과 바다’의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멍청하지만 우직한 순수함을 느낄 수 있어서다. 소위 곰 같은 여우가 인정받는 이 시대에 진정한 곰과 같은 사나이의 낭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낭만의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는 낭만이란 단어 자체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낭만적인’이란 단어가 주는 울림은 있다. ‘낭만적인’이란 말은 속세에 찌든 나에 대한 반성이자, 순수함을 갈망하는 원초적인 욕구이다. 산티아고 할아버지에게는 낭만이 있었다.


나는 낭만적으로 살 수 있을까? 밥벌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낭만은 사치가 아닐까? 낭만적으로 사는 것은 우리에게 하등의 이익이 없다. 여우처럼 사는 것, 곰 같아 보여도 여우짓을 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를 사는 내가 낭만을 찾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낭만을 찾는다. 불같이 타오르는 낭만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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