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곡자], 귀곡자
착하게 살 것인가? 유능하게 살 것인가?
사람은 이기적 동물이다. 남들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한다. 내가 먼저이고 남은 나중이기 때문에 남을 먼저 살리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과 함께 일을 추진할 때는 사람의 이기적 본성을 잘 헤아릴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는 베스트셀러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책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귀곡자’가 바로 그 책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가로는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과 연횡책으로 유명한 장의가 있는데, 소진과 장의의 스승이 귀곡자라 전해져 온다.
유세가란 군주에게 자신의 뜻을 설득하여 입신양명을 꿈꾸고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자 했던 제자백가의 사람들을 말한다. 즉 요즘말로 하면 취준생들이다. 유세가들의 최고봉은 좋은 군주를 만나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었다. 소진과 장의는 높은 벼슬에 올라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으니 유세가에게는 이상적인 존재들이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유세가들의 모범사례였던 소진과 장의의 스승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능시험에서 1등을 한 사람이 어떤 1타 강사의 강의를 들었는지 궁금한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진과 장의를 가르친 1타 강사 귀곡자 선생의 강의노트는 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귀곡자’는 아름다운 도덕책이 아니다. 유학에 익숙한 우리는 공자님, 맹자님 말씀에 익숙해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책은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귀곡자도 자칫 잘못하면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읽게 된다.
‘귀곡자’는 군주, 요즘말로 풀면 결정권자에게 다가가서 설득하고 일을 해내는 전반적인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일의 시작은 어찌할 것인지,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만약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한다.
‘귀곡자’는 일을 논의하기에 앞서 적절한 시기와 환경이 조성되었는지를 살피고, 일을 준비할 때는 결정권자와 굳건한 신뢰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이 진행되는 중간에는 정보의 우위를 점하고, 일을 해야 하는 상대방에게 돈이든 지위든 무엇이든 줘서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귀곡자’는 일반적인 정치사상서가 아닌 경영서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너무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인간을 분석하기 때문에 이게 춘추전국시대의 글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이다.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 두려워하는 본성에 맞춰 이를 계략으로 이용하라고 한다. 적에게 틈을 보이지 말고, 만약 적의 틈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그 틈을 벌려 유리하게 만들라고 한다. 이런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말들은 절대 점잖은 유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대학에서 국제정치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국제정치에는 크게 두 가지 이론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인본주의에 기반을 둔 이상주의가 있다. 이상주의는 인간의 도덕관념이 보편적이라는 전제하에 국제관계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유엔(UN) 같은 기구는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기구이다. 두 번째는 현실주의 이론이 있다. 이 관점은 국제정치는 정글과 같은 무법지대로 힘과 이익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엔(UN) 같은 기구는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하므로 각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잘 조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귀곡자’의 내용은 지극히 현실주의 쪽으로 기운다. 중국의 전국토가 작은 소국들로 분열되어 각자의 생존을 위해 전쟁을 벌이던 난세에는 이상주의적 주장보다 현실주의가 더 맞았을 것이다. 각 나라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부국강병이었지 백성들의 평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는 당시에 뜻을 펼치기 어려웠고, 귀곡자 스쿨의 수제자들인 소진과 장의가 널리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2024년 지금의 현실은 어떨까? 기원전 770년의 중국과 지금의 국제정치 환경은 무엇이 다른가? 한 국가를 무력으로 강제 병합하는 야만적인 행태는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의 공동 경제 이념이 된 이후 우리는 경제적인 난세에 살고 있다.
크게는 나라 간의 경쟁, 작게는 회사 간의 경쟁, 더 미세하게는 좋은 직장을 찾이하려는 개인들 간의 경쟁으로 우리는 생존의 위협에 맞서 몸부림치는 중이다. 지금 살아가는 시대가 난세라면 난세에 맞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옳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개인과 회사와 나라의 모든 전략이 도덕적 명분에 의해서만 좌우된다면, 막강한 현실주의적 가르침으로 무장한 집단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이다. 최소한의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귀곡자가 알려주는 계책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폐합: 철저한 분석으로 나가고 물러설 것을 정함.
저희: 우리 편의 틈을 예방하고, 적의 틈을 벌려라.
비겸: 상대방을 치켜세워주며 본심을 파악하라.
권모: 말로 주도적인 상황을 만들고, 사람을 용도에 맞게 사용하라.
결: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후회 없이 결단하라.
‘귀곡자’에서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도 일이 안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일이 달성될지 안될지는 하늘의 뜻에 달린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귀곡자’를 읽다 보면 안 될 일이 없어 보인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정보전의 우위를 점하며, 상대방을 떠보고 반목시키며, 우리 편의 신뢰를 강화하는 등의 귀곡자식 경영전략을 따른다면 못 이룰 것이 없어 보인다.
착하고 나쁜 것보다 유능한 지 무능한지를 따지는 귀곡자의 태도에 반감이 가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도 ‘아, 이건 좀 선을 넘는 것 아닌가?’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된 것은 지극히 현실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며 위안을 얻고 싶지만, 결국 푸석푸석한 땅바닥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귀곡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고 지평선을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땅에서 사는 것이지 하늘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호되게 꾸짖으시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