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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자 Feb 09. 2024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법

‘집에 환자가 생기니 가족들 모두 엉망이 됐다.’


며칠 전 친한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장인어른이 말기암판정을 받으시고 가족들 모두 걱정하고 슬퍼했지만, 몇 개월이 지나니 장모님이 먼저 죽고 싶다고 토로하신다는 이야기였다. 말기암 환자가 죽음의 공포에 질려 매일, 매시간  감정이 뒤바뀌니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피가 마른다고 했다. 그 가족들도 그 장인어른도 참 안타까웠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내가 말기암 환자인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몇 개월 뒤에 죽으면 어쩌지?’, ‘애들이 너무 어린데 나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남겨진 아내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님은 괜찮을까?’ 내가 당면하는 죽음보다 남겨질 사람들을 걱정하니 두려움이 배가됐다.


영혼이 있다고 믿으면 죽음이 덜 무서울까? 종교 없이 잘 살다가 죽기 직전에 종교를 믿으면 너무 이기적인 행동일까?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 불쌍하다고 여긴 신이 구원해 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망상들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으며 다짐한다.  몸속에 너를 품고 살다가 내가 먼저 죽은뒤 너를 보낼 것이라고.


최진영 소설 ‘구의 증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살아 있을 때는, 죽으면 죽은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 같은 곳이 아니더라도, 곡물을 체에 거르면 크고 무거운 것은 남고 작고 가벼운 것은 걸러지듯, 몸을 버리고 가벼워진 혼끼리 따로 모이는 우주가 있을 거라고.

 

몸이라는 무거운 짐은 훌훌 털어버리고, 영혼이라는 가볍고 자유로운 것만 남아 하늘로 올라간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두렵다. 내가 죽는 것보다 남이 죽는 것을 보기 때문에 두렵다. 사람이 죽은 후 덧없이 남겨진 시체의 모습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죽은 나무와 같다. 휘발유를 부어 불을 질러도 탈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그래서 생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의 그늘에서 쉬었다는 사실을 잊게 하는 그런 모습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그랬다. 과연 나는 그들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실 생각해 보면 죽으면 끝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붙잡힌 장수가 ‘내 목을 베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면 된다. 영혼도 필요 없고, 신도 필요 없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모르듯 내가 죽는 이유도 모른다. 모르는 것에 집착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이 없다.


적어도 후회 없이 살았다면, 당당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죽을 때 회한이 없도록 잘 살았다면 그 삶은 죽어도 될 만큼 가치 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잘 살았다면 그 죽음은 안타까운 죽음으로 동정받으면 안 된다. 국화꽃을 놓는 자리에 감사패를 올려야 한다.


잘 살았는지는 내가 스스로 평가할 일이다. 남의 평가를 받으며 살 필요는 없고 오늘 하루 죽음 앞에 당당한지 물어보면 될 일이다. 하루하루 후회 없는 삶이란 내일 죽어도 적어도 오늘은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다.


죽음의 공포를 오늘의 후회 없는 삶으로 대적하자.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다. 후회가 없다는 건 즐겁게 살았다는 것이니 애써 용쓸 일이 아니다.


오늘 하루가 행복했는가? 그렇다면 내일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


곡물을 체에 거르듯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표현이 가슴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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