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영웅 Mar 24. 2025

내 인생은 술을 마실 때와 마시지 않을 때로 구분된다. 어릴 때 술에 대한 기억은 밤마다 술을 마시고 귀가하시던 아빠의 모습과 이를 싫어하시던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는 늘 우리 자매들을 앞에 두고 술 마시는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마라고 당부하곤 했으니 술에 대한 이미지는 좋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권위적이지만 매우 가정적인 분이었는데 밤이면 술을 마시고 음주 오토바이를 타시다가 논두렁에 넘어지시곤 하셨다. 그래서 아빠가 늦게 오시는 밤이면 엄마는 전전긍긍해하셨다. 술에 취해 귀가하셔도 주사는 없었고 양말도 안 벗고 주무시면 양말을 벗겨드린 기억은 있다.

아무튼 술이라면 치를 떠는 엄마의 영향으로 대학생 때도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고, 아예 술자리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직장 생활에서도 술을 권하는 사람은 없었고 엄마의 소원대로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도 술을 마실 일은 전혀 없었다.. 여기까지의 삶은 술과 전혀 인연이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친정부모님께 맡기고 주말에만 아이들을 보러 가서 생활에 여유가 생길 무렵에 사무실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과 모임을 자주 갖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주가 되는 모임이었는데 나를 빼고는 다들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맥주 한 잔을 두고 입만 축이면서 안주를 축내던 나도 조금씩 술의 양이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자라난 실력이 점점 늘어 밤새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다 보면 꽤 많은 양을 마시게 되었다. 엄청난 안주에 맥주를 마셨기 때문에 음식을 먹다 목이 마르면 목을 축이는 용도였다. 그러다 취하는 맛도 알게 되고 점점 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애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때에는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잦은 술자리를 갖지는 못했고 술도 그다지 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여유로워진 저녁 시간에 술자리가 늘어나게 되었다. 회식을 빙자해서 시작된 모임은 밤 12시까지 진행되기 일쑤였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필름이 끊기기도 했다. 그럴 때는 두렵기도 했지만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으로 맥주가 내 삶에 깊이 들어왔다.

한 동안은 ‘밤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술모임을 주도하면서 그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밤 12시가 넘어서 귀가할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도가 심했던 것 같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대인 관계가 확장되기는 했으나 과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활발했던 술꾼의 삶은 주변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바뀌면서 다소곳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 걱정을 하게 되면서  회식을 해도 2차는 카페로 가는 조신한 모임으로 조금씩 변화했다.

그래도 맥주의 맛을 잊지 못해 치킨과 같은 기름진 음식을 만나면 맥주가 생각나는 맥주 마니아이다. 혼술도 가끔 하고 운동 후 마시는 맥주의 맛을 좋아한다. 혼자 마실 때는 음료수 대신 마신다고 생각할 만한 수준으로 한 캔 정도 마시지만 모임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거뜬하게 여러 잔을 마시는 걸로 봐서 술실력은 아직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술을 좋아하지만 맥주 외의 술을 마시지 않는다. 여행 중에 경치 좋은 야외테라스에서 마시는 맥주를 사랑하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곁들여 마시는 맥주를 좋아한다.

와인은 달고 걸쭉한 느낌이 싫고 소주는 알코올 냄새가 싫다. 깔끔하게 혀 끝에 감도는 맥주가 나에게는 가장 잘 맛고 좋아하며 가끔 생각나는 맛이다.

맥주는 겨울보다 여름에 많이 마시운동 후에 마시는 게 최고로 맛있다. 배부른 상태에서 잠자리에 드는 게 싫어서 주로 점심에 먹는 맥주를 좋아하기 때문에 직장에 출근하는 평일은 가급적 피하고 주말에 마시는 편이다. 남편이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로 혼술을 하게 된다.


가족 중에 맥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나뿐인지라 집에서 술 마실 기회도 많지 않고, 밖에서 친구들을 나도 굳이 분위기를 띄우지 않으면 차를 마시는 쪽으로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었다. 나이가 들면서 술을 자제하다 보니 술 마시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심심할 때 가끔 밖으로 불러내서 치맥 한잔 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맥주집에 가도 왠지 눈치가 보인다. 아이들은 술을 마실 줄은 알지만 즐기지 않는 편이고 나 또한 아이들 앞에서 술 마시는 모습도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 보니 맘 편히 가깝게 술친구 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게 아쉽다.


이렇게 써보니 나 자신이 술꾼처럼 느껴진다. 나는 술을 좋아하다기보다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양을 마시지는 않는다. 양주나 와인처럼 비싼 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가성비가 좋은 편이다.

인생을 조금은 살만하게 만들어 주는 데 맥주 한 잔의 기여도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부르면 좋아할, 나처럼 조금만 마셔도 기분 좋아지는 친구가 집 근처에 살았으면 진짜로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일단 그 친구랑 날 좋은 여름날 공원을 거닐며 걷술을 해보고 싶다. 맥주캔에 빨대를 꽂고 마시면서 걷는 걷술을 어떤 책에서 보고 바로 하고 싶었으나 혼자 할 수는 없으니까. 다정한 사람들과 맥주 한 잔을 나누는 즐거움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리기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