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처남
05. 처남
준호는 밤새 속이 부글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내를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나쁜 말도 아니고 충분히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 있는 일인데, 편안해야 할 주말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아내가 야속하기만 했다.
일어나 거실로 나온 그는 일부러 기침 소리를 내 보았지만, 아내가 지난밤 베개를 들고 들어간 방에는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는 이런 숨 막히는 긴장감이 싫었다. ‘어쩌면 우리 부부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살고 있고 또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언뜻 봐서는 접점 같아도 가까이 가보면 층이 달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선.’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 커피 한잔을 들고 발코니로 나왔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정원에는 신록의 향연이 벌어지듯 여기저기에 연녹색 풋풋함이 흐드러져 있었다.
아직도 조마조마한 결혼생활, 아이도 없어 자칫 깨질까 두려워 양보하고 참는 한계가 그 끝이 보이는 듯했다. 항상 문제는 사소한 생각 차이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아이들 장난 같기도 했다. 어제의 일이었다.
토요일 모처럼 아내가 좋아하는 일식집에서 같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아내는 어느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전시 중인 핸드백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격도 싸네, 이 옷과 어울리지 않아?” 그는 순간 옷장 여기저기에 버려진 아내의 핸드백과 옷들을 생각했다.
“여보! 그런 것들은 하나를 사더라도 싸다고 마구 살 것이 아니고 가격은 비싸지만 제대로 된 것을 사서 오랫동안 쓸 수 있는 것을 사도록 해.” 준호는 즉흥적인 낭비라 생각하고 마뜩잖아했다. 한두 번 쓰고 버리지도 않고 집에 쌓아 놓는 바람에 집이 정리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 준호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순간 밝았던 아내의 표정이 변했다.
“제대로 된 것 사려면 돈이 얼만데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아내는 뜻밖의 진지한 남편의 반대에 무안했던지 그 후로 입을 굳게 다물며 불만의 시위를 하는 중이다. 그것은 그 가방을 못 사서가 아니고, 가벼운 구매 충동과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자신의 약점을 꼬집는 남편의 꾸지람으로 생각했으리라. 상황을 보아하니 아내의 시위는 며칠을 갈 것 같은 생각에 오늘 휴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답답해하던 차에 구원의 방문자가 있었다.
“처남! 어서 와, 어쩐 일이야?” 평소와는 다르게 처남의 방문이 무척 반가웠다. 아내가 시위를 중단할 좋은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매형! 안녕하세요. 놀러 왔어요, 누나가 이야기 안 했나요? 온다고 미리 이야기했는데.”
“왔어?” 그때야 비로소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지금 몇 시인데 아직 자고 있었어?” 처남은 아내의 부스스한 얼굴을 보고 분위기를 살폈다.
“혹시 두 분 또 싸우신 것 아니죠?”
“너는? 우리가 싸울 일이 뭐 있냐? 맨날 매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싸움이랄 것이 뭐 있어야지.” 그렇게 아내는 화를 스스로 풀었다. 처가는 비록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식구들의 인물이 번듯하여 처남의 용모도 남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길거리의 모델 캐스팅 대상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겨우 지방대를 나와 작은 기업체에 취직하여 오래 있지 못하리라는 가족들의 예상과 달리 지금까지 착실히 근무하고 있다.
처남 덕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분위기는 살아나고 즐겁게 식사도 하게 되었다.
“처남이 올해 나이가 서른다섯인가 여섯인가?”
“벌써 서른일곱이에요, 매형.”
“너는 그래 애인도 없냐? 오늘 같은 휴일에 누나 집이나 놀러 오게.”
“누나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 장가보낼 생각은 안 하지, 좋은 여자 한번 소개라도 시켜주고 그런 소리 해요.”
“너, 그 좋은 인물 가지고 뭐 하는 거야, 언제는 여자가 줄을 서 있다고 큰소리치던 것이 언제인데.”
“하하하, 그것도 옛날이야기지, 요즘 여자들은 인물보다 돈 많은 남자를 찾고 있으니 어려워, 누나는 별 도움 안 되겠고 매형은 회사에 좋은 사람 없어요?”
“나도 처남이 능력이 좋은 것 같아 그쪽은 전혀 걱정 안 했지. 그렇게 고전하는 줄은 몰랐네, 앞으로는 신경 써서 찾아볼게.”
“아서라! 쟤는 뭐 여자 집안에 돈도 많아야 하고, 인물도 좋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네게 시집오겠냐고, 그런 여자는 네가 직접 찾아봐야 할걸.”
처남이 돌아가고 난 다음 준호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식사시간 대화 중에 처남의 상대로 불현듯 영선이가 떠올랐지만, 차마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처남을 소개하면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처남이 그녀가 바라고 있는 덕목이 될 수는 있는가, 한편 처남에게 그녀를 소개한다면 처남은 좋아할까? 여자의 미모로는 나무랄 때가 없다고 하지만 정현이와의 과거를 쉽게 넘을 수 있을까? 정현이는 과연 그러한 우리 사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처남에게 그녀를 보내면 남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나? 텅 비워진 그 공허함으로 가슴앓이나 하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영선에 대한 자신의 감정 깊이가 결코, 얕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사이 처남과 마시던 술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 잔을 채우며 가만히 영선이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 그 아이는 마치 깜깜한 밤에 건널목도 신호등도 없는 대로를 무단으로 건너려는 것과 같다. 안전한 건널목과 신호등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할 책임이 내게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녀를 처남에게 보낸다면 그게 합당한 처사인가?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처남과 영선이 결혼하여 항상 근처에 머문다면 나의 허틋한 마음도 달랠 수 있고 한편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지켜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사랑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지금 그녀와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정리할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이루어질 현실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아내의 생각이었다. ‘과연 아내는 영선의 과거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내는 영선이가 비서실에 있을 때부터 잘 아는 사이로 그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현이와 영선 관계를 비난했을 때도 아내는 돌 맞을 사람은 사장이지 그 애는 아니라고 그녀를 감싸던 것이 기억났다.
그는 어려운 모험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젯밤 생각한 결론을 가지고 아내의 의견을 듣기 위해 아침 밥상에 앉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회사 전에 비서실 근무했던 영선이라고 알지?” 아내는 무슨 소린가 하고 수저를 멈추고 쳐다봤다.
“그 아가씨 어떻게 생각해?”
“뭘요?”
“어제 처남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봤는데, 둘이 한번 만나게 하는 것이 어떨까?”
“아니! 어떻게 그런 여자애를! 당신 미쳤어요!” 아내는 눈을 크게 뜨며 팔짝 뛰었다.
“왜? 그 애가 어때서? 당신도 잘 알잖아. 그 애 그 사건만 아니면 흠잡을 곳 없는 여자야!”
“당신이 말하는 그 사건이 문제죠. 그것을 알고도 좋다고 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아내의 의견이 예상과 달라 그는 당황했다.
“그것은 우리 때 사고방식이고 요즘 젊은 세대들은 솔직한 과거는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 하잖아, 당신도 옛날에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것은 돌 맞을 일이 아니라고.”
“그야 나도 그 애 매력 있고 탐이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볼 때는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정현 씨와 우리 관계도 잘못하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럴까? 정현이는 내가 잘 설명하면 오히려 반길 수도 있어, 문제는 이것이 과연 처남을 위한 일인지가 아닌지만 생각하자고, 내가 왜 내 처남에게 빠지는 선을 보이려 하겠어, 어쩌면 그 애가 처남을 싫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영 못마땅하다면 당장 없던 것으로 하면 돼. 하지만 모든 것 다 밝히고 만나 본 후 양쪽 의견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 한번 만나게는 해봅시다.”
결국, 구현이는 건설회사에서 나오는 어음에 대하여 할인하는 일까지 병행했다. 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준호의 간곡한 설득으로 형은 조금씩 시간을 두고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현이는 현장 소장과 함께 시내 일식집에서 낮부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장님! 지금 속도로 보면 내년 말이면 충분히 준공할 수 있는 거죠?”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황 사장! 금 년에 아파트 시장 분위기가 안 좋아 건설회사 어음 할인율을 은행에서 3% 이상 올린 모양인데 황 사장도 그 정도 올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요.”
“예? 그렇습니까? 앞으로 여기 회사는 큰 문제없겠지요?”
“그럼요! 우리 회사는 잘 나가고 있고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든든한 그룹사들이 뒤에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금 년 들어 어음 지급일이 육 개월까지 늘어나더니 구현에게 찾아오는 물량도 많아지고 있었다. 그는 결국 현장 소장의 말에 안심하고 은행 대출까지 받아 물량을 점점 높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매스컴에서는 건설업체의 파산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으나 구현이는 외려 이것을 호기로 보고 할인율을 더 올려 공격적으로 어음 매집에 나섰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청우건설의 부도 위기설이 조금씩 나오더니 급기야 건설사 정리대상 목록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구현이는 귀를 의심했지만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가 없음을 알았다, 급히 현장 소장을 찾아갔지만, 현장 문은 닫혀 있었고 경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사현장이 문을 닫을 정도라면 회사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결국, 그달 말일자 어음은 물론 앞으로 매달 돌아오는 어음도 모두 지급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대그룹인데 무슨 수가 있겠지 생각하고 청우건설 본사를 찾아가 며칠을 동안 죽치며 매달렸지만 겨우 채권자 명단에 이름과 피해 금액만 적어놓고 그룹 차원의 처분만 기대하며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청우건설은 그룹사의 한 달간 심사 결과, 회생절차도 없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룹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결국 건설사를 손 절하기에 이른 것이다.
구현이는 지금 이 지경에 놓인 처지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었다. 그냥 주위 모두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특히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처지가 어느 때보다 절망적이었다. 부모나 다름없는 형은 항상 남들에게 자랑거리였고 자신을 보호해 줄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형이 형수 때문에 맘이 변했다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 청우건설 법정 관리단에서 자산 처분 1차 배분금이 백여만 원이 나온 것을 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수억 물렸는데 백만 원이라니, 이미 집과 가게는 경매에 들어가 앞으로 길거리에 나 앉을 지경 인 데다, 밀린 가게 월세와 결재하지 못한 물품대금 등으로 매일 채권자에게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준호는 일부러 한가한 시간을 골라 영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 안녕하세요.” 뜻밖의 전화에 영선의 목소리가 반가움에 들떴다.
“영선 씨, 식사는 했어? 지난번 인사부하고 이야기는 잘 되었나?”
“예! 조 이사님이 흔쾌히 제가 원하는 데로 하라고 하셔서 마음 편히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조 이사하고는 얼마나 친해졌어? 영선 씨를 맘에 두고 있는 것 같던데.” 준호는 무심코 한 말에 그녀가 조 이사와 가까워지는 것을 은근히 걱정하는 자신의 속내가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전무님도,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조 이사님 하고는 그런 사이는 아녀요.”
“농담으로 하는 소리야.”
“참! 그리고 회사에서 단체 동계 수련회가 있어 일주일 다녀올 예정이에요.” 그는 오늘 전화의 본론을 꺼내려했지만, 그녀의 말은 쉴 틈이 없었다.
“그래! 언제, 어디로 가는데.”
“모래 출발인데요, 이 회사의 연수원이 속초에 있다고 해요. 우리 회사도 양양에 연수원이 있었잖아요!” 그녀는 아직도 우리 회사라고 불렀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그때 강릉으로 출장 갈 일이 있다.”
“그러세요? 그럼, 그때 양양까지 오셔서 주무시고 가시면 안 되나요? 그래서 저희와 같이 식사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하하하! 그러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하기나 하겠어? 나는 일행도 있고 거리도 먼데.”
“그냥 한번 말해 봤지만 아쉽기는 하네요.”
“그럼 조 이사도 같이 가나?”
“그럼요, 인사부가 주관하는 것이니까 조 이사님이 인솔자이시죠.”
“아! 그렇구나, 아무튼 몸 건강히 잘 다녀오도록 해요.” 그의 여운이 있는 말에 그녀의 대답이 주춤한 틈을 타 그는 오늘의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내가 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괜찮나 모르겠네.”
“전무님, 뭔데요?”
“혹시, 영선 씨!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는 있나?”
“예? 전무님, 남자 친구요? 하하하, 저 아직 그런 것 없는데요. 전무님이 잘 아시잖아요.”
“아! 그래! 그래서 말인데, 내가 영선 씨 중매를 좀 서 볼까 하는데 어때?”
“예? 중매요? 갑자기 왜요?” 영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 저, 저 싫어요.” 한참 있다가 돌아온 것은 조금 전까지 들떠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무님이 왜 갑자기 저 중매를 스신다는 거예요?” 의외로 차가운 반응에 그는 당황했다.
“다름이 아니고 실은 내 처남이 있는데 영선 씨하고 잘 어울릴 것 같고 또 영선 씨가 너무 아까워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가 싫어서 이왕이면 우리 식구로 만들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고맙지만, 저는 아직 남자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요. 어떻게 하죠. 결혼할 생각도 없고요.” 그녀의 대답 소리에 시무룩한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왜? 기분이 안 좋은가? 그렇다면 미안해요.”
“그것은 아니고요, 전무님 저 죄송한데요, 제가 남자 친구가 필요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죄송해요.”
“그래, 내가 괜한 소리를 한 모양인데 못 들은 것으로 하고 그냥 잊어버려요. 그럼 연수 잘 다녀오고 또 연락해요.”
‘남자 친구를 소개하겠다는 소리가 그렇게 기분을 상할 일은 아닐 텐데, 아마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른 체한 것에 대한 섭섭함일까?’ 영선이가 상처받지나 않았나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차피 그녀의 마음을 받을 수 없는 자신 입장을 전하는 계기는 된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지난겨울이 빨리 들이닥치더니 금 년 여름도 덩달아 서두르는 양, 아직 유월인데도 전례 없는 무더위로 길거리는 열기 속에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만 무겁게 하였다. 정현이와 약속한 대로 시작한 골프, 연습장에도 시즌답게 사람들로 붐볐지만, 더위에 운동하는 것보다 앉아 노닥거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힘주지 말라는 코치의 잔소리를 피해 욕심껏 몇 번 휘둘러 보았지만, 땀만 나고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지친 나머지 앞에서 또박또박 치는 아가씨 모습만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멋있다, 뒤 모습이 영선이와 많이 닮았구나.’
그가 중매 건으로 전화 한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그녀한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회사연수도 끝났을 텐데,’ 준호의 뜻을 알아챈 그녀는 마음을 돌려 본연의 위치로 안전하게 찾아간 듯했다. 이쪽 회사의 모든 관계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는 연락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마치 뭔가 빠져나간 듯 매일 눈뜨면 허전하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과 영선이 사이의 경계선이 보이며 마음의 가닥을 잡을 수 있었고 안정도 얻는 듯하였다. 잠시나마 영선에게 향했던 자신의 마음이 애처롭고 허무한 것이 새벽에 깨기 전에 꾼 잠깐의 단꿈과도 같은 아쉬움이었다. ‘그래, 서로 잘된 일이야,’ 그는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준호는 부산을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가고 있었다. 길이 막히는 바람에 기차 출발 시간에 늦어 허둥지둥 뛰어 올라타자 기차는 출발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자리를 찾아갔는데 자신의 번호에 웬 여자가 미리 앉아있었다. 차를 잘못 탔나 싶어 확인했지만 분명 자신의 자리였다.
“여기 제자리인데요.” 그러자 여자가 그를 돌아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웃음기 없이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 영선이었다.
“영선 씨가 여기 웬일인가?” 그러자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서 나가려 했다. 싸늘하기가 얼음장 같았다.
“영선 씨 어딜 가려고?” 그는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것 놓으세요, 기차를 잘 못 타서 내려야 해요.”
“차가 달리고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내려!” 그는 소리치면서 뛰어가는 그녀를 잡으려 허둥대다 잠에서 깨어났다.
준호는 어젯밤 그 꿈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영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싸늘한 표정이 아직도 차가웠다.
그러던 차에 전화벨이 울려 보니 신기하게도 영선이 전화였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너무 딱 떨어지는 우연에 소름이 올랐다.
“여보세요!” 영선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전무님! 저 영선이에요, 안녕하셨어요.” 꿈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 같았다.
“그래요! 연수는 잘 다녀왔어? 건강은 괜찮아?”
“예! 전무님! 저, 시간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
“저 다름이 아니고 지난번에 말씀하신 것 말인데요, 그 처남분 한번 만나 보려 하는데 지금도 괜찮을까요?”
“그럼! 괜찮고말고.” 그는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걱정이 돼요, 처남분이 저 같은 여자를 좋아할까요?”
“영선 씨도 마찬가지 아냐? 결과는 봐야 하겠지만 판단은 만난 후에 결정하면 되지 않을까, 하여튼 고마워, 어떻게 갑자기 생각을 바꾸게 되었어?”
“그냥 전무님이 많이 생각하셔서 말씀하신 것 같아 궁금하기도 하고 믿음도 갔습니다.”
준호는 끊어진 것으로 알았던 그녀와의 관계가 다시 살아나게 되어 마음은 가벼웠지만, 한편으로 어깨는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