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회한
12월 16일
미경은 버림받았다는 아픔에 며칠을 지새우고 마침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가슴 가득한 그리움, 이대로 있으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잊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그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택시에서 내려 그 집 앞에 섰다. 집은 불이 꺼져 있고 차도 보이지 않아 그가 집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갔나?'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이 대문과 마당에는 낙엽이 쌓여 황량하였다.
지난번까지만 해도 전화 연결 신호는 있었는데 지금은 계속 없는 번호로 나온다. 전화도 끊어버린 것은 분명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이별 통보라 생각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한마디 말도 없이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었나? 정말 비겁하다. 네가 뭔데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 것인데!'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복받치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행여 재호가 나타날까, 마을 어귀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정없이 떨리는 몸이 추운 줄도 몰랐다.
“저기요! 아가씨!"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어느새 웬 아주머니가 다가와 있었다.
“혹시 이 집을 찾아온 것이요."
“예!"
“이 집 지금 아무도 없는데."
“그래요? 혹시 이 집주인 이사 갔나요?"
“이사요? 아가씨는 누구신데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이 집주인 돌아가신 지가 열흘이 넘었소."
“예? 돌아가시다니요? 여기 남자 주인이 죽었다고요?" 그녀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요! 아마 자살했다고들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고 서울에 사는 부인이 와서 발견했다지요." 미경은 넋이 나가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터벅터벅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얼굴에 눈물은 말라 있었다. 그녀는 어귀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몇 달 동안 미쳐 찾았던 그 집,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듯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그녀의 머리는 차가워졌다. 그와의 짜릿한 황홀의 시간 들, 그리고 고통과 갈등들이 주마등 같이 떠오르며 한낮의 꿈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이렇듯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허상을 쫓아서 미친 듯 헤매었나?’ 그녀는 마치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듯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그 먼 길을 와서
나는 이곳에 서 있다
한길 가에
먼 곳을 멍하니 쳐다보며
빈 두 손을 느려 트린 채...
왜? 힘들어?
그렇게 종종거리고,
쉬지도 않았는데....
회 한
재호 아내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진즉 내려와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모든 것 정리하고 며칠 있으면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었는데, 내가 좀 더 일찍 서둘러야 했었어. 뭐가 급하다고 외롭게 홀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린 남편도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당일 하루 전부터 남편과 연락이 되지 않자 다음날 아침에 급히 이천 집으로 내려왔다. ‘이 양반이 전화기를 또 무음으로 해놓고 모르고 있나?' '혹시 뇌출혈로 쓰러지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은 애써 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문 앞에 도착해 그녀가 바라본 집 모습은 그녀가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의 차는 주차장에 있는데 아무리 불러도 집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덜컥 겁이 나고 다리가 떨려 선뜻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을 다투는 긴급상황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안방 문을 여는 순간 메스꺼운 냄새에 그녀는 등이 오싹함을 느꼈다.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는 남편. 언뜻 봐도 그 느낌이 정상이 아니었다. 급히 남편 곁으로 달려간 그녀는 그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알았다.
“여보! 여보! 정신 차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남편. 뺨을 치고 미친 듯이 흔들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급히 119를 불렀다. 침대 곁에는 술병과 함께 하얀 약병이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곧 방으로 들어선 응급대원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는 응급실로 향했다. 금 년 초 한 여자를 싣고 공포와 절망으로 달려온 그곳을 이번에 그는 아무런 고통 없이 도착했다. 사망진단서에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적혀 있었다. 의사는 자살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아내는 적극 부인했다.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고 현장에 아무런 유서도 없었으며 원래 심장을 비롯한 순환기계통의 진단을 받았던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아내는 말 없는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설렘으로 그 집에 들어간 지 일 년 만에 신발을 벗은 채 그곳을 떠나온 것이다.
은지는 그의 사망 소식을 김 과장으로부터 받고 큰 충격에 빠졌다. 한 달 전에도 통화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허탈함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자신이 어려울 때마다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었던 아빠같이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부탁을 거절한 뒤 계속 마음에 걸려 언젠가는 자신이 스스로 모델을 자청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때 그것이 뭐 대단한 부탁이라고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리어 왔다. 황망히 가버린 그가 야속하기도 하면서 그녀는 그렇게 허전한 봄을 맞이해야만 했다.
형주는 재 수술을 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재활치료도 받았지만 끊어진 신경세포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그는 그 상태가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는 이천 그 주택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기억하기를 피했다. 자연히 거기에서 살고 있는 재호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집에 들어앉아 구필화가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사건으로 그 집을 떠난 지 2년 만에 재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휠체어에 앉아 그 집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낯설고 황량한 모습이 예전에 자신이 지었던 그 집이 아니었다. 그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는 이 집에서 죽음보다 큰 무슨 고통을 받았기에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을까? 그는 자신의 모습과 친구의 죽음이 일 직선상에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순간 집터에서 나온 아이의 무덤을 떠올렸다. 그는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그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운명이 기구할 뿐이다.'
이른 봄 재호 아내는 남편을 찾아왔다. 순식간에 많은 것이 변한 삶에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은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과점을 한다고 나서지만 안 했어도, 그 집을 사겠다고 했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는데, 적어도 남편이 그 집으로 내려갈 때 만사 제치고 따라왔었더라면 이렇게 남편을 혼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남편은 잔설을 덥고 누워있었다. 묘석에 놓여있는 낯선 국화 한 다발, '누가 다녀갔나?' 꽃이 아직 싱싱한 것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식구들이 다녀가지는 않았을 텐데, 누가 이 먼 곳까지 그를 찾아왔을까?'
너무 일찍 가버린 남편, 그이 친구들은 아직 건강하게 활동하며 가족들과 저렇게 잘 지내고 있건만. 그녀는 비로소 남편이 자살을 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 집에서 말 못 할 고통을 당하며 살지 않았나? 가족에게도 말 못 할 그것이 뭐였을까. 그러나 그녀는 곧 머리를 흔들었다. "여보! 그렇게 불행했던 일은 없었지요? 혹시 있었더라도 이제 다 잊고 평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도록 하세요."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닌 그리움!
아무도 없는 뻐꾸기 우는 산속에서
바람 같은 이 그리움을 어찌하라고.
정근이는 마침내 미경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회한의 시간들을 이곳에 버리고 그들은 훌쩍 캐나다로 떠났다.
미경은 남편이 자신과 재호와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몰랐고 정근이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했다.
그 후 그 전원주택은 급 매물로 나와 있으나 오랫동안 거래가 되지 않은 채 잡초와 낙엽 더미에 묻혀 방치되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기 있게 들어선 운명의 마차는 거만하게 한번 둘러보고는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 달려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