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절망
10월 31일
재호는 한동안 아들이 잠잠하여 모든 일이 잘 해결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부부가 살면서 아무런 난관과 갈등 없이 살아온 경우가 얼마나 있으리오, 결국 다 견디고 지나다 보면 한때의 추억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의 기대는 아내의 전화 한 통으로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보! 얘들 이혼하기로 결정했데요.” 아내는 모든 것을 체념하듯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소식을 알려 왔다.
“엉! 어떻게?”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최악의 결론 소식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 둘이 만나 이혼에 합의하고 오늘 법원에 조정신청 하기로 했나 봐요.”
“....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아이는 지연이가 데려가고 대신 기준이는 매달 양육비를 주기로 했고, 집은 시세를 알아보고 절반 값을 계산해서 지연이가 기준이에게 한 달 내로 지불하고 명의를 넘겨주기로 했나 봐요. 이제 우리도 포기하고 마음 정리합시다. 여보,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저렇게 정신적인 고통을 받으며 계속 산다는 것도 서로 못 할 일이지요, 그렇다면 하루빨리 갈라서서 각자 삶을 사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사전에 우리에게 상의도 없이 그게 될 말인가?”
“그렇다고 우리와 상의해 본들 다른 수가 있겠어요? 지난번에 이혼에 관하여 우리에게 이미 이야기 다 했잖아요! 그래도 기준이가 합리적인 선에서 결정을 잘한 것 같으니 이제 별도리 없어요,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럼 손주는 우리 보지도 못하고 데려가는 것인가?”
“아이는 한 달에 두 번 데리고 올 수 있다고 하니 이전보다 더 자주 볼 수 있어 다행이에요.”
재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결국, 지연이를 호텔에서 봤던 것이 마지막이었구나.' 결혼식 때 행복하게 웃던 지연이 모습과 그간 시댁에 와서 며느리 노릇 하겠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던 모습들을 회상하면서 무너지는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이제까지 순조로웠던 자신의 인생이 그 사건 이후 먹구름이 들더니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머잖아 천둥과 번개도 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11월 10일
은지의 초상화에 대한 답변을 애타게 기다니 던 중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밝은 것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제가 너무 늦게 전화를 드렸네요. 아직도 제 초상화 모델이 필요하신가 해서요.”
“아! 그럼요, 무척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저 그 모델하고 싶어요. 언제 어떻게 하면 돼요?” 그는 뛸 듯이 기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들로 인한 상심과 미경으로 인한 갈등, 심지어 점점 조여 오는 파멸의 그림자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감사합니다, 아, 그러면 언제가 시간이 되세요?”
“저는 아예 오늘 시간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예? 오늘요?” 그는 준비하는데 너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잠시 망설였다.
“예! 저도 좋습니다.”
“그런데요, 말씀하신 문화센터에서 사람들이 보는 곳은 좀 그렇고 선생님 댁 화실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니 이곳은 누추한데 그래도 괜찮아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해서 좋을 것 같아요.” 그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내가 댁으로 모시러 갈게요.”
“아닙니다. 남의 눈도 있으니 제가 제 차로 갈게요.”
“아니! 이곳 잘 모르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너무 뜻밖이라 그는 놀랐다. '이 여자가 생각보다 대담한 곳이 있구나.' 생각했다. 그는 바빠졌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향수를 뿌리고 청소가 다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린다. 황급히 현관문을 여니 화사한 차림의 그녀가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그는 감격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코트를 받아 들고 집안을 둘러보는 그녀를 안내했다.
“집이 전망도 좋고 너무 예쁘네요. 혼자 이렇게 계시면 외롭지 않으세요?”
“그런데 나는 이 집이 체질적으로 맞나 봐요. 그러다가 심심하면 서울에 가서 좀 있다 오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렇게 결정해 주셔서 뭐라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자격은 안 되지만 그간 선생님께 진 신세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쥐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분위기에 만족한 듯했다. 그녀와 이렇듯 내 집에 단둘이 앉아있다니, 그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집이 햇볕도 잘 들고 따듯한 것이 남향집인가 봐요. 화실은 어디예요?” 그는 그녀를 화실로 안내하여 이젤 앞 의자에 앉혔다, 자세를 잡기 위해 만지는 손끝에 느끼는 그녀의 육감과 코끝으로 올라오는 그녀의 육향은 그는 정신이 몽롱하게 했다. 드러난 하얀 목덜미와 깊숙이 패인 가슴골에 그는 올라오는 욕정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의 백옥 같은 목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녀는 긴 신음 소리를 내며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의 호응에 더욱 흥분하여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한참을 그녀의 입술을 탐닉하다 보니 갑자기 은지는 간데없고 미경이가 눈을 감고 그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모든 것이 너무 허무했다. 그러나 아직 코끝에 남은 그녀의 생생한 향기와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 촉감은 잠시나마 황홀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몇 번이고 되풀어 생각하게 했다.
11월 12일
한 달이 지났는데도 은지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며칠 전 꿈에 본 그녀가 자꾸 떠오르고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이 지났는데. 그는 시계를 본 후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길어지는 신호음에 초조해진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별일은 없으시죠?”
“아 참! 지난번 말씀하셨던 모델에 관하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자신이 없네요. 제가 경험도 없어 쑥스럽기도 하고, 아직 이혼 한지도 더구나 엄마 상을 치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남의 눈도 있고 해서요.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더 좋은 분을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그는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며 모든 기대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이 지옥 같은 사고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수많은 날을 보낸 삶이 너무 허무했다. 그동안 그녀와 많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음을 비로써 알 수 있었다. 그는 전화를 끊은 후 집안을 둘러봤다. 휑하니 낯설고 무섭다. 이제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나를 두고 가지 마오~
언제까지인가 이 외로움
가슴 깊이 사무치는 이 그리움
술잔에 비치는 너의 모습에
떠나지 마오.
제발 떠나지 마오.
영 싫으면 날 떠나게 해 주오.
슬픔은 제발 두고 가지 마오.
남은 그 많은 흔적을 어찌하라고.
그간 우리의 시간을 둘로 나누지 마오.
잘린 상처 그 아픔 어찌하라고.
당신이 떠난 이 공간에 나를 버려두지 마오.
숨을 쉴 수가 없다오.
제발 내게 당신 뒷모습을 보이지 마오.
당신 없는 그 많은 시간을 두고 가지 마오.
그 그리움에, 그 외로움에,
나는 남아 있을 수 없다오.
나는 이곳에서 혼자 일 수가 없다오.
11월 15일
산소는 오늘따라 더 고요하고 쓸쓸하였다. 아버지 기일을 맞아 혼자 찾아온 산소에서 정근이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마무리해 보려고 했다.
산소에서 내려다본 세상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요즘 잠을 계속 설치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옥 그 자체였다. ‘아버지! 도와주세요.’ 그는 미경과 헤어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혼자 자신을 키울 때 심정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내가 혼자서 얼마나 상처받고 외로움에 고통받았는지 아버지는 헤아렸을까?' 그리고 미경을 처음 알았을 때의 희열과 그동안 미경과 행복했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렸다. 사람은 고쳐 쓰는 법이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스스로 고치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더 미경을 사랑한다면 나를 버릴 수 없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그는 답답한 나머지 며칠 전 직장 상사에게 넌지시 의견을 구해보았다.
“부장님 내 친한 친구의 아내가 바람이 나서 이혼을 하네 마네 하고 있어요. 그 친구는 이혼하기로 결심한 것 같고 저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한 번은 용서하라고 했는데 그게 맞을까요.”
“한번 깨진 그릇이야. 용서한다고 한들 친구가 받은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아! 아마 그 여자도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을걸. 아이들이 안 되기는 하지만 정리하는 것이 났다고 봐!” '그러나 그것은 그가 듣고 싶은 답이 아니었다. 상사도 막상 본인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렇게 자신 있게 결정을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받은 상처까지도 내가 스스로 감싸 안으면 치유할 수 있다. 내 경우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자.'
11월 20일
오늘은 마침 토요일이라 기분전환도 할 겸 가족들과 시내 식당을 찾았다. 정근이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마침 식당 TV에서 해외 이민자 생활을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민이나 갈까?‘ 차라리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멀리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것이다! 새로운 삶! 우리에게는 저것이 필요해!'
“왜? 갑자기 이민이 가고 싶은데?”
“갑자기가 아니야, 내가 이곳에 내려오기 전에도 이민 이야기 한번 했었지? 당신은 반대했지만, 용우 교육을 생각하고 또 여기서 치열한 직장생활보다 내가 그곳에서 열심히 만 한다면 훨씬 넉넉한 생활을 할 자신이 있어. 지난번 캐나다에서 주유소 하고 있는 친구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곳에 마트도 같이 하면서 아주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지.”
“아! 난 싫어! 나는 그런 데서 낯설고 외로워서 못 살 것 같아.” 역시 미경 생각은 여전히 이곳에 묻혀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끊어내고 멀리 떠나 새 출발 하는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방법을 찾기에 골몰했다. ‘어떻게 하면 둘 관계를 갈라놓을 수가 있을까. 다행히 그는 나이 든 사람이다. 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 사람을 직접 찾아가 겁박하여 아주 혼쭐을 내줄까?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양심에 호소라도 해볼까? 아니면 그 사람 아내를 찾아가 남편 단속을 잘하라고 야단을 치고 올까? 그러면 그 아내가 미경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치겠지. 어떻게든 그자를 우선 만나보자.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다음 대책을 세우자.'
11월 21일
아침 일찍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 우리 제과점 부동산에 어제 내놓았어요. 자리가 좋고 장사가 잘되는 곳이라 곧 인수자가 나타날 것 같아요.”
“아니 뭐요? 나한테 상의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재호의 언성이 높아졌다.
“당신 하고 상의 안 한 것이 뭐가 있다고 그래요? 지난번에 내가 내려가서도 이야기했고, 또 당신 쓰러졌을 때도 이야기했잖아요!”
“무슨 소리를 언제 했다는 거야! 나는 못 들었는데, 안돼! 당장 취소해요!”
“당신 건강상 혼자 있으면 위험해서 내가 금 년에는 정리하고 내려가겠다고 누누이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당신 곁으로 가겠다는데 왜 그렇게 반대를 하는 거예요? 혹시 내가 내려가면 안 되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이 사람이 사정이 있기는 뭐가 있다고 그래! 한참 잘 되는 사업인데 아까워서 그런 것이지.”
“그래도 사람이 중요하지 돈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래요. 물론 나도 힘들지만, 당신이 거기에서 혼자 그러고 있는 것이 위험해서 그렇지요. 당신 친구도 혼자 있다가 그렇게 된 것 아시잖아요!”
아내는 물론 남편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컸겠지만, 부쩍 전화도 자주 하고 이곳에 오면 구석구석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지난번 머리카락 사건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않은 듯했다.
“곧 이곳이 정리되는 데로 내려갈 테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하세요. 아들까지 저렇게 되고보니 이제 나도 모든 것이 부질 없다 싶어 그만 쉬고 싶어요.” 신변 정리를 하라는 통보였다. 아내와 같이하는 이곳 생활을 상상하면 그간 아내 몰래 저질러 놓은 것 때문에 뭔가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았다. 제과점이 팔리기 전에 올라가 아내와 다시 협상이라도 해야겠다. 이제 홀로 된 아들도 어쩌면 챙겨봐야 하는데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하려고 하는지, 아내가 못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