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연민
10월 3일
“선배님 그 화신문구 여사장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알고 계세요?”
“그래? 그 문구점 옛날 여사장?”
“그래요, 모르고 계실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아! 은주, 요즘 내가 미경에게 미쳐서 그녀를 챙기지 못했구나. 그녀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사실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언제 돌아가셨나?”
“오늘 새벽이래요, 저는 지금 문상 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시면 제 차로 함께 가시죠.” 그는 잠시 생각을 했다. 자신이 문상을 가도 되는지.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있어 마치고 갈 테니까 먼저 다녀와요.”
‘얼마나 황망할까, 유일한 그녀의 울타리였던 엄마가 이제 떠나고 없으니 그 슬픔이야 오죽할까.’ 가슴이 먹먹해지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급히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장례식장이 있는 병원 사거리 신호등에 차가 섰다. 하필 그 사고가 있던 날 죽어가는 그 여자를 태우고 응급실을 찾아왔던 그 병원이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우회전을 하지 않고 직진을 했더라면. 혹시 이 장소가 그 여자와 나의 삶의 변곡점이었던 것은 아닌지, 자신의 순간 선택이 잘못됐던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상가에는 의외로 문상객들로 번잡했다.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고 분향소에는 젊은 사람들이 조문을 받고 있었다. 먼저 출발했던 후배도 볼 수 없어 혹시 상갓집을 잘못 찾았나 싶어 재차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후 영정 앞에 섰다. ‘맞다 몇 개월 전에 봤던 그 노인이다.’ 사진 속의 고인은 여전히 깔끔하고 의지가 강해 보였다. 그런 딸을 남겨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고인의 비통함을 느끼며 국화 한 송이를 올렸다.
조문을 마치고도 그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그녀의 얼굴이라도 꼭 보고 갈 생각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전 시댁 사람들도 많이 와 있는 듯했다. 손이 필요하다면 자신도 손발 걷어붙이고 나설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한참 후 그는 분향소에 서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엄마를 떠나지 않고 있다. 곁에 같이 서 있는 사람은 아마 전 남편인 듯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검은 상복과 어울려 고결함이 품어 나오고 차분한 그녀의 표정은 의연함 마저 느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는 선뜻 다가가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멀리서 계속 바라만 보고 있던 그에게 그녀의 눈길이 닿았다. 그녀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짧게 인사하고 다시 영정을 바라봤다. 그는 순간 아무 답례도 표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눈빛으로 충분히 위로의 뜻이 전해졌으리라 생각했다.
상가를 떠나면서 벌써 온몸 가득히 밀려드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뼈가 시려 온다. 아직도 자신이 그녀로 인한 중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10월 8일
은지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모셔드렸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시고 문상까지 오셨어요? 선생님이 오실 줄 몰랐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세요.”
“언제 뵈면 제대로 감사 인사드릴게요. 그리고 웬 조의금을 그렇게 많이 하셨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튼 감사드려요.”
“그래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신다면 제가 더 고마운 일이죠. 졸지에 당하신 일이라 상심이 크시겠지만 잘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뭐라 더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힘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요, 건강 잘 챙기시고, 혹시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뭐든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그렇게 다시 만날 기약 없이 전화를 마치고 나니 온종일 마음이 허전하여 일손이 잡히질 않았다.
재호가 서울을 다녀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아내는 또 내려온다고 한다. 이제는 아내 만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서울에서도 아내와의 밤을 거듭 실패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병원 정기검진 결과 우려한 순환기계통은 이상이 없고 기력이 조금 쇠하여진 것으로 우려할 필요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굳이 내려올 필요 없다는 그의 만류에도 남편이 나이가 들어 원기가 쇠하여졌다는 의사 말에 그녀는 보약이라며 한 봇짐 싸 들고 내려왔다.
아내는 이제 들어서면서 집안을 살펴보는 것도 하지 않고 앉자마자 약 복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내는 말을 하면서도 소파 등받이에 틈에 붙어있는 뭔가를 집어 올리려 애를 썼다.
“여보 이게 뭐예요? 이것이 왜 여기에 있지?” 아내의 손에 붙어 올라온 것은 긴 여자 머리카락이었다. 그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내는 그것을 유심히 살피며 코를 대고 냄새도 맡아본다.
“이것 여자 것인데, 내 것도 아니고 우리 식구 중에 이렇게 긴 머리는 없잖아? 이 집에 어떤 여자가 다녀갔어요?”
“응! 그게 뭐야? 다녀가긴 누가 다녀가.”
“그럼 밖에서 바람에 날려 들어왔나?” 그는 당황하여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할지 몰랐다.
“글쎄 왜 이런 것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신 혹시 여자 있는 것 아니야? 그렇지? 당신 요즘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설마?”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이 밖에서 묻혀 들어온 것일 수 있잖아! 생사람 잡지 마!” 그는 일단 화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들어와서 그곳 근처에 간 적이 없는데.” 그는 화도 통할 것 같지 않자 급한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아! 그 김 과장 여기 내 후배!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했지! 지난번 여기에서 저녁 식사 한번 했다고. 그때 그 집 와이프와 같이 왔더라고, 맞다. 그 여자 머리가 긴 생머리였지, 그때 그 사람들이 그쪽에 앉았었어. 그때 떨어진 거야! 그 사람 아니면 이 집에 여자가 올 리 없어요. 괜한 오해받을 뻔했잖아!”
“확실한 거요? 하기야 당신이 여자를 밝히는 사람도 아니고 성격상 여자와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밖에서 하지 집으로 데리고 올 저급한 인간도 아니지.”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갈수록 교활해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순간 긴장했잖아! 당신을 믿어야지 이제 뭘 어쩌겠어요.” 아내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의구심은 완전히 떨쳐버린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10월 12일
가을을 불렀더니 겨울이 같이 들어왔다. 푸르다 못해 검푸른 하늘, 존재를 거부하는 태고의 외로움에 마음이 저미어 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은지예요.” 뜻밖의 그녀 전화에 그는 가슴부터 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좋으신 것 보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내 마음이 좋습니다. 그는 들뜬 마음에 장황한 인사말을 건넸다.”
“다들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선생님도 여전하시죠?”
“그럼요! 항상 잘 지내고 있지요. 왜? 무슨 일 있으세요?”
“다름이 아니고 염치없는 부탁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무슨 일인데요?”
“전에 문방구 자리에 가전제품 회사가 들어왔는데 위층 식당에서 물이 떨어지나 봐요. 그래서 지난번 저희 집 손봐주신 분들에게 작업을 좀 부탁드려도 되나 해서요.”
“아! 그래요! 가능하지요. 상가건물은 주택보다도 작업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그 집이 영업 중이라 지장이 없이 작업이 가능했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그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바로 현장 조사부터 시키도록 하지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귀찮은 일만 부탁드려서."
“별말씀을 저는 항상 환영합니다. 그는 이 또한 그녀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10월 18일
재호는 일주일 동안을 그 집으로 출근하여 깔끔하게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그녀와 다시 그 식당에 마주 앉을 그는 그동안 이 집 때문에 그녀와 만남이 중단되었다 이 집 때문에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이 집 사장이 돌아가신 미경 엄마에게 둘이 만남에 관한 이야기하는 바람에 관계가 소원해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운전은 좀 많이 늘었나요?”
“예! 지난주에는 서울도 다녀왔어요.”
”차가 있으니 편하시죠?”
”그럼요! 삶의 질이 달라졌어요. 일찍 시작했어야 했는데 후회가 돼요.”
”잘하셨어요. 그러나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고는 순간이거든요." 그때 재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미경이에게서 온 전화다. 순간 당황하며 밖으로 나가서 받을까 생각하다 그 꼴이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어! 그래! 알았어요. 내가 지금 손님하고 식사 중이니 끝나고 내가 전화할게요. “ 들뜬 기분에 갑자기 찬물이 쏟아졌다. 좀 더 여유 있게 대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낸 전화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미경이는 나중에 달래주면 돼.’
“바쁘신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같이 그림 그리는 후배입니다.”
“요즘도 그림 때문에 자주 다니시나 봐요.”
“아니요! 날씨도 그렇고 풍경도 예쁘지 않아 주로 집에서 정물을 그리고 있어요.” 그는 물 한 모금 들어마시고 그녀에게 여태 하고 싶었던 말을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 여사 내가 뭐 좀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오해하거나 부담 갖지 말고 편안하게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녀는 긴장하는 눈빛이다.
“이 여사 얼굴 뷰가 전형적인 황금비율인 거 아세요?”
“예? 황금비율이요? 제가요? 하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이 여사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말이지요, 내가 이 여사의 그 아름다움을 상상으로 캠퍼스에 표현하고자 했는 도저히 나타낼 수 없을 것 같아 이 여사가 직접 모델이 한번 되어 주시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얼굴의 모델요? 하하하 저는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여사를 만난 것은 유일한 행운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시간도 많이 빼앗지 않고 편하실 때 반나절 만 시간 내주시면 되거든요.”
“반나절 만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나요?”
“예! 우선 밑그림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사진으로 완성하면 됩니다. 장소는 시청 문화센터 회화반 같은 곳에서 한다면 자연스럽게 부담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럴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뜻밖의 제안에 적지 않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절대로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하면 됩니다. “ 그녀는 즉답하기가 어려운지 커피잔을 만지작 거린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작업하면 안 되나요?”
"예”, 사진으로 작업하는 방법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진이나 다름없지요, 시간을 들여 밑그림 작업하는 것은 실물의 감을 눈으로 읽고 기억하는 시간이거든요. 원래는 전 작업을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작업을 해야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될 경우에는 살아있는 작품을 위한 시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
“갑작스러운 말씀에 좀 당황스럽기는 해요. 제가 그래도 되는지, 좀 시간을 주시면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되나요?”
“그럼요, 거듭 이야기하지만 절대 부담 갖지 말고 지금이라도 어려워 쉽게 거절해도 됩니다. 대신 수락해 주시면 큰 은혜로 알고 두고두고 생각하겠습니다.”
재호는 은지를 납득시키려 심혈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오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장소를 자신의 집 작업실로 제안하고 싶었지만 단둘이 갇힌 공간에 있는 것을 더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지레 꺼내지 못했던 것이 좀 아쉽기는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럴 날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단 동전은 하늘로 날랐다. 앞면이냐 뒷면이냐는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아무튼, 고심하던 일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아차!’ 벌써 4시가 넘었다. 미경에게서 전화 왔던 것을 잊고 있었다. 황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는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재호는 두 여자를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나이도 비슷한 것이 아마 동갑일 수도 있겠다. 은지와 미경, 내가 과연 두 여자에게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각 무엇일까? 한쪽은 갈급한 내 영혼의 완성이라면 다른 쪽은 찌들어 지친 내 육신의 방황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언젠가 영혼의 완성을 위해 육신의 방황은 빨리 끝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