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원주택 - 미행

21. 미행

by 왕십리

10월 19일

"오늘 하루 휴가 낼 테니 같이 병원에 가볼까." 정근이는 어제부터 앓기 시작한 아내의 안색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였다.

"괜찮아! 오늘 하루 푹 쉬면 좋아지겠지. 오빠 어서 출근하고 미안하지만, 용우 아침 좀 챙겨주고 유치원 등원만 좀 시켜주고 가."

"그것은 걱정하지 말고 병원 안 가봐도 되겠냐고.”

"괜찮다니까! 내가 영 견딜 수 없으면 혼자 다녀올게.” 그동안 많이 좋아졌던 아내가 다시 침체되는 것을 보고 여간 걱정이 아니다. 한때 좋아했던 바닷가 여행도 시들해지고 외출도 뜸해지며 기력을 찾지 못하는 것이 그 우울증 증세가 다시 찾아온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

"용우야! 오늘 유치원 끝나고 집에 갈 때 아빠가 데리러 올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왜 엄마는 맨날 아파?”

"매일 아니고 오늘 하루만 그러는 거야.” 오늘따라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혼자 터덜터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유난히 외롭고 안쓰러워 보였다. 혼자 아빠 밑에서 자란 그는 그 외로움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용우에게 동생을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미경의 반대로 기회만 살피고 있다. 그나마 아내가 요즘 들어 자주 피곤하다고 하여 잠자리마저 함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행복한가 자문해 보았다. ‘답답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아. 곧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


10월 20일

미경이는 어제도 전화를 받지 않더니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것이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재호는 이러다가 미경이 무슨 일을 벌일지 은근히 겁도 나고 걱정도 되었다. 신호는 가는데 여전히 받지를 않는다. 막 끊으려 하는데 연결이 되었다.

"여보세요!” 예상대로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미경아! 전화받을 수 있어?”

"예! 괜찮아요.”

"어제는 미안해! 그럴 사정이 있었어. 나중에 바로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됐어.” 미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예! 말씀하세요.”

"화 많이 났구나, 그러지 마.”

"전무님 저 오늘 갈게요, 보고 싶어요.”

"오늘? 아! 어떻게 하지? 나 오늘 병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어 곧 서울 갔다가 내일 돌아오는데.” 그는 급한 대로 핑계를 댔다. 오늘 미경이 상태를 볼 때 이곳에서의 만남은 피하고 싶었다.

"그럼 갈 때 이곳에 들렀다 가시면 안 돼요?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그는 더 이상 피하는 인상을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서 여주로 향했다. 그는 미경의 집념이 점점 높아지는 느낌에 걱정과 불안함이 밀려온다. '이래도 되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이러다 미경 남편에게 걸릴 수도 있고 아내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데.'

미경이 알려준 장소에는 아직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급하게 화장을 하고 나타난 그녀의 얼굴은 마음고생으로 수척하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재호는 측은한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미안해요! 그러지 않으려 하는데 잘 안 돼요. 그렇다고 절 이상하게는 보지 마세요. 절대 경우 없는 짓은 안 할게요.”

"그래! 우리 이럴 때일수록 마음 편하게 하고 건강 잘 지키도록 하자. 예약시간 맞추려면 지금 가야 하니 다녀와서 내가 전화하게. 그때 만나서 이야기하자.” 커피집 복도를 나서자 미경이 몸을 기대어 온다.

"왜 전무님은 저를 사랑한다는 말이 없으세요? 나는 이렇게 죽겠는데.”

"그래! 내가 표현력이 없어서, 미경아 나도 사랑해!” 그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차에 올랐다. 차가 모퉁이를 돌아 안 보일 때 까지 미경은 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저미여 온다. '그래도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여자다.'

10월 22일

정근이는 용우 하원 시간에 늦어 마음이 급했다. 이왕 조퇴하는 것 조금 일찍 나올 것을. 이미 하원 시간이 훌쩍 넘어 유치원 근처에는 모두 빠져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유치원 뜰 양지바른 곳에 용우가 혼자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본 그는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안에서 뛰어나온 선생을 향해 그 답지 않게 큰소리로 따졌다.

"아니 선생님 얘를 추운 곳에 혼자 이렇게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합니까! 이거 아동학대 아녀요?”

"아! 아버님 죄송해요. 용우가 극구 밖에서 엄마 기다리겠다고 해서 잠깐 그곳에 있게 했습니다. 방치한 것이 아니고 안에서 계속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좀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는 놀란 눈을 뜨고 바라보는 용우를 보고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아내에게로 화를 돌렸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외출도 아니었다. 그런데 점심때쯤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용우 하원을 친구 엄마에게 부탁했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용우를 챙기지 못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남편에게 긴급 구원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아이에게 소홀하게 하는 아내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애써 그는 아내의 입장을 살피려 했다.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러나 곧 집에 도착하겠다는 아내는 생각보다 늦어진다. '오늘따라 어디 먼 곳에 갔나?'

그는 갑자기 아내의 옷장이 궁금하였다. 열어본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명품 핸드백 케이스였다. 아내가 요즘 들고나가는 핸드백이 명품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뒷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이것이 어디에서 난 거야? 이 비싼 것 내가 사준 것은 아닌데 누가 사준 것인가?' 그는 불길한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설마 하면서 아내가 그럴 리는 없다고 믿었다.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머리는 뒤죽박죽 되었지만, 추호도 나쁜 상상은 하기 싫었다.

"오빠! 미안해! 내가 좀 많이 늦었네.” 황급히 들어서는 아내를 보자 충격에 그의 눈이 커졌다. 이제까지 그렇게 화사한 아내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처음 본 코트에 화려한 목걸이, 귀걸이 그리고 문제의 그 상표 핸드백, 도저히 자신 아내의 모습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그는 정신이 멍해져서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그녀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오빠! 괜찮아! 피곤해 보이는데 힘들었지.”

"어! 괜찮아. 어디 먼 곳을 다녀온 거야?”

"그 친구가 모처럼 소래포구에 다녀오자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시간이 걸릴 줄 몰랐네. 오빠는 회사에 다시 가봐야 되는 것 아냐?” 그는 얼떨결에 밖으로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았다. 아무리 현 상황을 이해하려 해도 이것은 아니다. 그의 불길함은 확신으로 굳혀가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있다. 이천 친구 집에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이까지 남에게 부탁하면서까지 게다가 그렇게 화려한 옷차림으로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과연 아내에게 남자가 생긴 것일까? 도대체 누구일까? 어떤 놈인데 미경이 넘어갔을까? 도대체 내가 못해 준 것이 뭐 있다고 다른 놈에게 눈이 돌아갔을까? 우리 용우와 나를 두고 그럴 수가 있나?’ 그는 깊은 수렁에 빠져 발이 허공에서 버둥대는 기분이었다. 아내가 차려준 저녁 식사도 뜨는 둥 마는 둥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하기만 했다. 아내에게 따져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물어본들 아니라고 잡아떼면 확인할 수 없이 서로에게 상처만 남을 뿐이고 설마 인정을 한다고 하면 그게 더 무서울 뿐이다. 용서할 테니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달라고 한다면 미경이 어떤 길을 택할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럼 미경과 이혼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상상하기도 싫다.

어린 시절 어느 날 엄마가 홀연히 그의 곁을 떠날 때 겪은 상처와 그 후 긴 시간 외로움과 싸움에서 받은 고통은 그의 강한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용우에게 그런 세상을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엄마가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는 잘 알고 있다. 이런 남편의 고통과 달리 아내는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 있다.

그는 속이 복받쳐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와 아내가 마시던 술을 찾아 한잔 따라 단숨에 마셨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취기가 오른 그의 심정은 지금이라도 아내가 스스로 마음을 잡고 돌아온다면 모든 것을 모르는 체 옛날 일상으로 회복하여 살 수 있으련만 그것이 쉬운 일일까.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발가벗고 뒹구는 상상에 몸서리치는 배심감과 차오르는 분노는 그를 극한으로 내몰고 있지만, 그는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미경과 헤어져 살 수 있을까. 영원히 미경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상대 미지의 남자에 대한 공포감도 들었다. 얼마나 센 놈일까? 돈이 많은 사람일까? 그래 조금 더 상황을 살피고 확인해 보자.


10월 25일

이른 아침, 재호의 차가 아파트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미경은 차에 올랐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자신이 선물한 액세서리와 함께 한껏 치장을 한 미경을 보자 오면서 염려했던 모든 것이 눈녹 듯 사라지고 가슴마저 설레었다. 그들의 차는 동해로 향하고 있었다.

미경은 남편이 지방 출장 가는 틈을 타서 그와 하루의 여행을 제안하고 그것을 지금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미경은 생전 차를 처음 타본 양 흥분하며 재호를 향해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은 어떻게 하고?”

"엄마한테 도움을 청했지요.”

"그럼 어머니가 집에 와계신다고?”

"그렇죠!”

"미경이 어머님이 나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

"아! 그것이 그런가요! 하하하.” 미경이는 세상만사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듯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하하하 저거 보세요. 감들이 다들 꼭대기에만 열려 있어요, 저것들은 너무 높아서 못 따나 봐요.”

"그러기도 하지만 저것은 까치들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둔 거야."

”하하하 저도 알거든요, 까치밥!”


동해 바닷가! 미경이가 최근 다녀온 곳이라 사정이 밝아 재호와 함께 오게 되었다. 철 지난 바다에는 아무도 없이 황량하기만 했고, 남편과 왔을 때와는 달리 바람과 거친 파도는 그들의 방문을 거부하는 듯했다. 그러나 미경재호와 같이 이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는 코트 자락 속으로 파고드는 미경을 감싸 안고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마치 연인이 이런 곳에 오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순간 재호는 이 여자가 만약 은지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실소를 머금었다.

차가워진 그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음식점 별실의 창가에 앉아 걸어왔던 모래사장과 바람에 밀려오는 파도를 보면서 설렘과 흥분으로 들떴다. 안에서 보는 바다는 평온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이 바다를 쳐다보면 혼자 쓸쓸하게 걷고 있었다. 미경은 순간 남편이 떠올랐지만 애써 지우려 머리를 흔들었다.


곧 주문한 싱싱하고 푸짐한 회가 식탁을 가득 채운다. 오늘 치를 거사를 상상하며 상기된 그들은 타들어오는 갈증에 술부터 찾았다. 취기가 오르자 미경의 흐트러진 자태에 농염이 흐른다. 웃음 짓는 눈꼬리, 풀어진 재킷 사이 깊은 가슴골, 드러난 하얀 허벅지, 마주 앉은 재호는 올라오는 욕정을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미경이 옆으로 옮겨 앉아 그녀의 가슴 그리고 다리 사이를 정신없이 애무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히고 입술을 찾았다. 곧 후속 음식이 들어오는 노크 소리에 그는 동작을 멈추고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서 지체할 수가 없었다. 차려진 음식을 버려둔 채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호텔 앞에서 미경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남편과 들렀던 곳이다.

”왜? 싫어?"

"아니요! 누가 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무도 없는데 너무 긴장하지 마!”

샤워실에서 미경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재호 머릿속에는 지금 그렇게 애태우던 은지도 없었고 그렇게 자신을 괴롭힌 베트남 그 여자도 없었다. 다만 황홀한 욕정에 취해 구름 속을 마냥 날아갈 뿐이다. 샤워를 하던 미경이 타월을 두른 체 샤워실 문을 빼꼼히 열고 재호를 부른다.

”전무님! 우리 샤워를 같이해요. 저 좀 씻겨 주세요.” 그는 발가벗은 그녀의 몸을 안고 샤워실로 밀고 들어갔다. 곧 폭발할 것 같은 아래 중심을 억누르며 그녀의 몸 곳곳을 씻겨 내리자 그녀는 요동치는 그의 중심을 잡고 자신의 그곳에 문지르며 신음하였다. 재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 위로 던졌다. 그녀의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어깨 위로 올리자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 그의 머리를 감싸았다. 다리 사이에 묻힌 그의 얼굴은 그녀의 뜨거운 샘물과 부드러운 육향에 한참을 취하여 무아의 경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몸통이 정신없이 파닥거린다.

독이 오를 대로 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그의 중심이 숲을 헤치고 샘 속 깊이 전진을 시작하자 가득했던 샘물이 밖으로 흐르고 꺽꺽 소리와 함께 그녀의 사지는 사정없이 부들거렸다. 그녀의 숨넘어가는 소리와 교성이 방안에 가득하면서 드디어 한참을 요동치던 그의 중심에서 품어 나온 불덩이가 그녀의 몸 깊숙이 가득 채우고 넘쳐흘러 내렸다.

그렇게 미끄러져 내려와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중심에 또다시 그녀의 손이 다가왔다. 그것은 그녀의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신통하게 다시 살아났다. 그녀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녀를 뒤집었다. 무릎을 꿇려 엎드리게 하여 그녀의 그곳이 위로 쳐들게 하였다. 그리고 등 뒤에서 격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너 오늘 죽어봐! 어린것이 까불면 혼난다. 내가 오늘 기어이 네 항복을 받아내고 말겠다.’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등위로 엎드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부여안고 한 손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렇게 땀으로 한 몸이 된 그들의 분탕질은 한참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숨결마저 잦아들어 방안은 고요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속에서 한동안 각자 나름의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는 비로써 은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행동이 퇴폐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끝을 모르고 달리는 미경의 집착이 다시 걱정으로 다가왔다.

"제가 문란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전무님을 좋아할 뿐이에요. 절대 전무님에게 부담 주지 않을게요.” 미경은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요즘 나는 너 때문에 젊어지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있는데. 다만 이러다가 네 가정에 문제라도 생기지 않을까가 제일 염려스러울 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아파트 입구 문이 열리자 활짝 웃어 보이며 손을 들고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과연 질주하는 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10월 26일

정근이는 도통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자신의 일생에 가장 큰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일상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보인다. 그냥 단순 오해로 인한 한낮 해프닝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러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의혹이 있다. 계속 혼자서 지옥 같은 일상을 보내며 속앓이 하던 그는 마침내 비겁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나 수요일에 이틀 대구에 출장 다녀와야 해." 좀 야비한 생각이 들지만 내 사랑하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정근이의 맘과는 달리 날씨는 너무 화창했다. 출장차비를 하고 집을 나선 그는 상가 휴게실에 앉아 아파트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신에 자괘감이 들었다. 유치원 등원을 위해 용우 손을 잡고 바쁜 걸음으로 앞을 지나가는 아내, '저 사람이 내 아내인가!' 오늘도 행복한 인생을 위해 종종 대는 모습에 애틋한 마음이 든다. 아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자 이제 예상대로 아내가 움직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오전 중에 아무런 동향이 없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로 출근할 생각이다. 그러나 그 기대가 깨지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나타난 장모를 본 순간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역시 미경은 오늘 오랜 시간의 외출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에 낙담하였다. 아내는 바로 아파트 입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역시 아내의 화려한 옷차림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는 잠시 후 나타난 낯선 승용차에 환한 웃음과 함께 납치되듯 사라졌다. 그는 계속 뛰는 심장을 안고 급히 달러 나와 뒤편에 대기시킨 차를 몰아 그들을 쫏기 시작했다.


회색 중형 승용차, ‘도대체 어떤 놈이냐?’ 큰길로 진입하기 전에 그 차는 신호대기에 서 있었다. 분노의 눈길은 두 사람의 뒤통수를 붙잡고 있었다. 비로써 그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절망감에 그는 눈물이 났다. 그 차는 유유히 고속도로로 빠져나가 동해 쪽으로 향했다. 나와 수없이 다녔던 이 길을 아내는 다른 남자와 가고 있다.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너무 다정한 모습으로. 나하고는 한 번도 저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그는 앞차의 뒤통수를 힘껏 받아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밀려오는 슬픔과 분노, '이제 나의 인생의 행복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그들이 멈춘 곳은 한 달 전에도 자기와 같이 왔던 곳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린 상대를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두려워했던 그 상대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후반의 사람 아닌가! ‘아니 저럴 수가. 아내가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내가 저런 자에게 지금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무너지는 자존감과 상실감에 몸이 떨려왔다.

백주 대낮에 자신의 아내를 코트 안에 감싸고 다정하게 해변을 걷는 그 사람. 정근이는 참담한 심정에 차에서 나와 그들이 걸었던 길을 뒤따라 걷다가 아내가 사라진 식당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들은 따뜻한 곳에서 행복을 나누고 있는데 그는 배고픔도 잊은 채 찬바람 맞으며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급기야 남자의 팔에 매달려 스스럼없이 호텔로 들어가던 아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그는 운전대 밑으로 머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그들은 호텔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아내에게 저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상하며 그는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미경아! 너 어쩌자고 이러는 것이냐! 우리 동우는 어떻게 하라고!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이러면 이젠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어! 어떻게 해, 도저히 너와는 이제 같이 살 수가 없는데.’ 그는 꺽꺽 소리 내며 짐승같이 울부짖었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은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호텔 문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거의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를 그는 다시 쫒기 시작했다. ‘네놈의 정체가 뭐냐!’ 오늘 꼭 알아내 죽여버리고 말겠다. 아내를 버리듯 여주 아파트 앞에 내려놓고 도망가는 차의 뒤를 바짝 붙여 따라 붙였다.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이천으로 빠져나갔다. ‘그동안 미경이 이천 친구 집이라는 것이 이놈에게 다녀온 것이 틀림없구나.’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정근이는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쳐들어가 요절을 내주고 싶었다. 지친 나머지 다 포기하고 돌아가 쉬고도 싶었다. 이미 초겨울 짧은 해는 산허리에 누웠고 주위는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는 작전을 세워 다시 오기로 하고 여주로 돌아와 모텔을 찾아 드러누웠다. 당분간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보기가 두려웠다.


10월 29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결정할 때까지 미경이에게 내색을 해서는 안된다.' 그는 오후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해맑게 맞아주는 아내. 얼굴을 보면 증오로 폭발하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거와는 달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밤새 생각했던 것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출장 잘 다녀왔어? 오빠! 오늘 저녁 준비가 안 됐는데, 우리 슬이나 한잔할까.” 너무나 태연한 모습에 그는 이 여자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그 불여우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너 때문에 내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너무 취하면 이성을 잃고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할지도 모른다. 그는 일어나 동우에게로 갔다. 아빠가 이렇게 힘든 것도 모른 체 잠에 떨어진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동우야 아빠 힘들어, 이제 나 어떻게 하냐? 그래 아빠가 너만은 꼭 지켜줄게! 너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지킬 거야.’


* 추가 말씀 : 약속날짜에 맞춰서 급하게 발행하느라 오탈자가 많았다는 핑계 말씀 올립니다. 독자들께 큰 결례를 깊이 반성하며 차기 작품에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발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keyword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