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윤 정근
10월 2일
오늘 서울로 퇴근해야 하는 정근이는 서둘러 회사를 나왔다.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며칠 좀 쉬게 할 요량으로 아내를 설득하여 친정집으로 보냈다. 사위까지 오면 엄마가 더 힘들다고 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굳이 그는 아내와 떨어져 있기 싫다며 매일 서울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야! 너는 어디가 안 좋아서 그렇게 힘들어하냐? 병원에서 진찰은 받아 본 거야?” 친정엄마는 딱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뭐 별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처지고 피곤하네.”
“참 희한도 하다. 병도 없고 매일 집에서 무슨 일을 얼마나 한다고 매일 피곤하다고 하냐! 윤 서방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장모님 그게 아닙니다. 요즘 아이 하나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아세요? 옛날하고 다릅니다. 그리고 미경이 생활하는데 낙이 있고 의욕이 있으면 그렇지 않을 텐데 이렇게 시골에만 데려다 놓고 미경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그냥 마음이 아플 뿐이지요.”
“아이고! 윤 서방! 고맙네, 그렇게 우리 딸을 생각해 주니 더할 나위 없네, 내가 미안해!” 장모는 천방지축 지기 딸이 남편 하나는 잘도 만났다고 생각했다.
윤 정근
어머니가 가난 때문에 집을 나간 뒤로 어린 정근이는 무너지는 세상을 겪었다. 주벽이 심해진 아버지는 그나마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온종일 맘 붙일 곳 하나 없는 집안에서 혼자 밥을 찾아 먹으며 심지어 빨래도 했다. 친척도 하나 없이 고립무원 그는 외로움과 싸움에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였다.
어느 날 엄마가 너무 그리운 정근이는 서랍 속에 있던 엄마의 주소를 발견하고 혼자 엄마를 찾아 나섰다. 엄마가 사는 아파트는 온통 매끈한 대리석으로 밟고 들어서기가 미안할 정도로 화려하고 깨끗했다. 현관문 앞에서 그를 본 엄마는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공원으로 갔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엄마의 표정이 아니었다.
“너! 여기를 어떻게 알았어? 혼자 온 거야? 너 여기에 갑자기 이렇게 오면 안 돼!”
“엄마! 나 엄마하고 같이 살고 싶어!”
“뭐? 정근아 너는 아빠하고 살아야 돼! 너 성이 윤 씨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아빠 자식이야, 아빠하고 살아야지. 여기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살고 있어서 너하고는 살 수가 없어.” 정근이는 엄마의 엄한 목소리에 겁을 먹고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서 조심해서 가고, 네가 훌륭하게 크면 그때 우리 보고 만나면서 지낼 수 있을 거야.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하도록 해. 버스 끊기기 전에 어서 돌아가! 아빠한테 혼나지 말고.” 엄마는 아들의 손에 돈을 쥐여 주며 총총히 아파트로 돌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몇 년을 계획하여 맘먹고 찾아온 것인데, 그는 쉽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파트 입구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다시 입구에 나타났다. 꼬마 여자애와 갓난아이를 안은 엄마는 앞에 대기한 승용차에 올라타 그의 앞을 지나 아파트를 빠져 사라졌다. 차 속의 엄마는 아이들 챙기며 정근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비로써 엄마가 생소하였고 자신이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 엄마에 대한 갈망은 없어졌다.
중학교 때 아빠가 새엄마를 데려온다고 하자 그는 거부감보다 외롭지 않은 생활에 기대감이 컸다. 그리하여 새엄마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였다. 원래부터 하던 청소와 설거지는 그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잘 대해주던 새엄마의 태도는 해를 넘기자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방관하에 새엄마는 먹는 것, 입는 것, 일상 사는 것에 대해 차별이 심했고 급기야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자체를 싫어했다.
급기야 고등학교 때부터 정근의 가출은 심해졌다. 새엄마로부터 받은 상처는 엄마에게서 받은 그것보다 더 심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은 혼자임을 느끼고 스스로 사는 법을 찾았다. 혼자 노력하여 대학도 진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하여 반듯한 직장에도 취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동료 결혼식에서였다. 유난히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의 나이가 서른이 훌쩍 넘자 단란한 가정을 갈망하던 그도 당연히 신부의 친구들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설레는 마음에 결혼식 내내 그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며칠 후 동료가 신혼여행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 친구를 점심시간을 이용해 외부로 불러냈다.
“최형! 재미 좋았어?”
“좋지! 그래도 신혼이잖아. 왜 그래? 할 말 있어?”
“그런데 혼자만 재미있지 말고 나도 장가 좀 가게 해줘! 좀 도와줄 수 있지?”
“도대체 뭔데 뜸을 들여.”
“그날 신부 친구 같은데 내가 점찍은 사람이 있는데 이 여자야! 혹시 결혼 한 사람은 아니지?” 그는 그날 찍어둔 그 여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런! 언제 사진까지 찍어 놨어! 아! 알지, 아내 학교 친구야! 이형 눈도 높네, 하하하! 아직 결혼은 안 했는데 사귀는 남자가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걱정하지 마! 내가 아내에게 부탁해 볼게. 이형! 프로필 사진 하나 내게 보내줘! 설마 뺨 맞는 일은 없겠지?” 그 후 며칠이 지나도 동료로부터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아! 그쪽에 이야기는 했는데 아직 답이 없나 봐.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윤형에 대한 자료도 다 보냈으니 가부간 연락이 오겠지. 기다려 봅시다.” 그쪽에서 답이 온 것은 무려 한 달이 다 돼서였다.
“윤형! 축하해! 이번 토요일에 한번 보자는데 시간이 어떻소? 우리 아내가 공을 많이 들인 것이니 잘해야 해!”
그들은 호텔 커피숍에서 같이 모였다. 밝은 회색 정장 차림의 그녀는 그때와는 또 다른 신선함을 느끼게 했다. 동료 아내가 연신 그를 대변하는 것은 이미 결정권은 상대가 갖고 있다는 뜻이겠다. 인물 좋고, 회사에서 능력 인정받고 술 담배도 안 하며 벌써 시내에 아파트도 장만한 능력자란 것이었다. 정근이 띄우기를 마친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두 분 잘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료는 그를 향해 엄지를 세우고 윙크를 보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지난번 결혼식 때 보고 마음에 들어 제가 계속 친구에게 떼를 썼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어느 쪽에 앉아 계셨어요?”
“예! 신랑 측 중간쯤에 있었는데 신부 친구들이 바로 앞에 앉아있어 그때 보았죠.”
“아! 미경 씨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윤정근이라고 합니다. 저는 집안도 볼 것 없고 오로지 건강한 몸뚱이 믿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저도 피차일반입니다. 저는 지금 건설회사 다니고 있어요. 저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네요?”
“예! 친구에게 대략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제 친구 지연이 참 재미있죠? 친구들 사이에 산소 역할을 하고 있지요. 정근이는 집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 봐 염려했으나 다행히 미경이는 이야기 주제를 바꿨다.
“취미가 뭐예요?”
“저는 뭐 지금 취미라고 할 것 없어요. 그러나 결혼하게 되면 배우자와 같이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미경 씨는 뭘 좋아하시는데요?”
“저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없지만 여행 다니는 것은 좋아해요.
”맞아요! 저도 여행 좋아하지요. “
”그곳에서 식사까지 마친 후 정근이는 곧 다시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오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애프터 미팅까지 이루어진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미경은 웃으면서 말했다.
“연락 번호 알려 주시면 제가 연락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기다릴 테니 꼭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신의 명함을 건너 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하였고 정근이의 열열한 구애 작전으로 그해 가을 마침내, 결혼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외로움에 감성이 메말라 있던 그는 그렇게 그리던 가정을 통하여 비로써 심신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오늘도 아내는 외출 중이다. 정근이는 퇴근 수 용우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친구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아내에게 불만도 있었다. 한편 요즘 친한 친구가 많지도 않고 오로지 그 친구 하나인데 외로워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퇴근 때 우편함에서 들고 온 아내의 카드사용에서 의아한 부분을 발견했다. 예전보다 사용금액이 많은 데다 사용 내용은 지난달에 구매한 외출옷 외에도 아내의 옷과 신발과 화장품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간 육아 때문에 포기했던 자신의 관리를 이제부터 챙기는 것은 그녀로서 긍정적인 현상이라 생각했다. 이번 달 생활비는 좀 더 생각해야겠다.
8:30분 생각보다 아내는 늦어진다. 미리 늦는다고 했으니 전화하기보다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아내. 술을 한잔 한 듯한 얼굴인데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오늘 늦었네. 오빠 미안해 많이 기다린 거야? 신혼인 얘가 왜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게다가 버스도 늦게 오고 속이 타서 혼났네. 용우 저녁은 먹었어?”
“응! 우리도 저녁 먹어야지. 그는 퇴근 때 사 온 피자를 폈다.”
“오빠 아직 저녁 안 먹은 거야?”
“그래!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잘됐네! 피자와 맥주가 잘 어울리지. 우리 맥주도 한잔하자.” 불그스레한 아내의 얼굴이 탐스럽게 빛났다.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도 유난히 색시해 보였다. 취기가 오른 그는 마음이 설레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빨리 샤워를 끝내고 성난 중심을 앞세워 전투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아내는 이미 곯아 떨어 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