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옆자리의 동료와 정기 모임을 갖는다. 그녀와 나는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한 후, 그 동네에서는 나름 유명한 카페를 찾아갔다. 우리는 둘 다 커피를 마시지 않기에, 생과일주스를 선택할 참이었다. 하지만 동료는 오늘따라 안경을 챙기지 않았다며 벽에 붙은 메뉴판을 읽지 못했다. 나 역시 눈이 좋은 편이 아니라 평소처럼 가장 빠른 방법을 택했다.
“생과일주스 뭐 되나요?” 생과일주스는 시기를 타는 메뉴라 그런지 메뉴판에 써 놓고도 주문을 하면 그건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차라리 처음부터 생과일주스는 뭐가 되냐고 물어보는 편이 주문하기가 수월했다. 가장 먹고 싶은 음료를 골랐는데, 안 된다고 하면 또다시 골라야 하니까.
카운터의 점원이 눈도 맞추지 않은 채, AI처럼 대답했다. “쓰여 있어요.” 우리도 눈이 있는데, 쓰여 있는 걸 몰라서 물었을까. 나는 눈을 찌푸리며 생과일주스 종류를 읽어냈다. 오렌지 x 파인애플과 사과 x 당근 두 종류였다. “오렌지 파인애플이랑 사과 당근 두 종류 있어요.” 이 문장 하나를 대답해 주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시력이 좋지 않은 어르신들이 와서 물어도 메뉴판을 보라고 대답하고 말 건지 씁쓸함이 스쳐갔다. (위에서 ‘찌푸리며’는 눈이 좋지 않아 글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을 묘사한 표현이지만, 의도는 없었으나 써 놓고 보니 중의적으로도 읽힌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쓰는 세상, 다들 휴대폰으로 지도를 열 수 있지만 지도를 읽지 못해 길 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길을 누군가 물어온다면, 길을 알려주지 ‘스마트폰에 지도 있잖아요.’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객이 비용을 지불하고, 그곳에서 파는 상품에 대한 질문을 했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답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날의 생과일주스 한 잔은 우리가 매일 먹는 구내식당의 6천 원짜리 점심보다 비싼, 무려 8천 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