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또 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며 주변의 모든 기기들은 디지털화되어 갔다. 집에서는 정수기와 인덕션, 선풍기, 가습기까지. 버튼을 누를 때마다 '삐'하는 기계음을 지르며 설정 모드가 바뀌곤 한다. 회사에 놓여있는 정수기는 구형인데 컵을 들이밀면 바로 물이 나온다. 뜨거운 물은 분홍색 버튼을 누른 후, 들이밀기.
그런데 디지털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려면 버튼 누르고 기다리기. 양 조절할 때는 또다시 버튼 누르기. 나오는 물의 양도 아날로그 정수기보다 많지 않다. 그만 따르려면 다시 버튼 누르기. 귀찮기가 그지없다. 선풍기 역시 마찬가지. 아날로그 선풍기는 내가 원하는 모드를 택하기까지 툭 튀어나와 있는 버튼 한번 꾹 누르는 것으로 끝이다. 그럴 때마다 가전은 역시 아날로그가 짱이라는 옛날 사람다운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꿀 때는 분명히 더 좋다고 해서 택한 결정일 텐데, 결과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많다. 가스레인지와 달리 시각장애인은 도저히 알 수 없는 평평한 버튼으로 무장한 인덕션도 그렇고.
내게 있어 디지털임에도 느린 기기의 최고봉은 지하철에서 책을 대여하는 도서대여기다. 기존 구형은 화면에서 예약도서를 확인하면 닫혀 있던 여러 개의 서랍들이 동시에 '파박'하고 열린다. 매우 아름답게 한꺼번에. 입을 벌린 서랍에서 책을 수령하면 그걸로 끝. 하지만 어느 날인가 디지털이랍시고 신형 기기로 교체됐다. 기기는 첫 번째 책을 가지러 부지런히 움직인다, '위잉'. 그리고 달랑 책 한 권을 뱉어낸다. 다시 두 번째 책을 가지러 달려간다, 또다시 '위잉'. 세 번째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만 한다.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서랍형 도서대여기. (아직 기기를 바꾸지 않은 지역은 어떤 이유에서건 참 잘한 결정이다.) 나는 오늘도 세 권의 책을 맞이하기 위해 세 번의 '위잉'을 지켜본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서랍형 대여기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