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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틀비와 함께 May 26. 2024

너무 '고귀한' 나-소로

불친절한 은둔자의 불복종

한때 TV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었던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미국의 자연철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월든 호숫가 근처 오두막집에서 홀로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월든이라는 숲 속에서 자연의 법칙을 연구한 그는 1817년 7월 12일생으로 영혼의 숫자가 9번 은둔자이다. 은둔자의 체크리스트를 살펴보면 '독립적인 사고와 결단력, 주류 사회의 가치와 트렌드 거부, 혼자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강조, 프라이버시와 신뢰, 전문가"가 중요한 키워드이다. 소로만큼이나 완벽하게 은둔자의 체크리스트에 맞는 사람이 또 있을까?      


예전에 한 지인이 뇌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로의 『월든』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월든』을 다 읽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뇌의 근육이 단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로의 작품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다. 소로는 『시민 불복종』에서 1846년 7월 미국이 벌린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면서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고 감옥에 투옥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이 있는 현재 상황에서 ‘일개’ 개인이 아니라, ‘고귀한’ 개인이 실현할 수 있는 정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더부살이가 되기에는 
혹은 온 세상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도 고귀하게 태어났노라” (『존 왕』 5막 2장)


내가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존 왕』에 나오는 “나는 너무도 고귀하게 태어났노라”이다. 부사 ‘너무’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으로 부정적인 상황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이 인용문에서 ‘너무’는 정부의 억압과 횡포 속에서 나의 인간성을 절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개인의 독립성과 고귀한 인간성을 강조한다.      


"정의롭지 못한 법률이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률에 따르면서 그저 만족해야 할까. 아니면 그 법들을 고치려고 노력하면서 성공할 때까지 복종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 즉시 그 법률을 위반해야 할까?" (458)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방법을 선택했는가? 다수는 “지금과 같은 정부 아래서 다수를 설득해 법을 개정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소로는 “지금 즉시 그 법률을 위반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은둔자답다. 개인의 정의와 다수의 합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인에게 소로는 단호하게 개인의 정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소로의 목소리는 은둔자가 자신의 공간에서 나와 세상에 진리를 전파할 때처럼 직설적이며, 단호하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소로의 주장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는 내가 ‘국민’이라는 대중 속에 있는 것이 편하다면 이것 역시 나의 선택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두 번째는 내가 아무리 정부의 잘못을 지적한들 뭐가 달라질까? 정말 효과가 있는 걸까? 


첫 번째 의문에 대해 소로는 개인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신 그 선택이 불의에 일조하여 타인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면, 그 선택은 존중받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불의가 남에게 불의를 저지르게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 법을 위반하라. 당신의 삶이 그 기계를 멈추게 하는 반대 마찰이 되게 하라. 이럴 때 내가 할 일은 스스로 비난하는 그 잘못을 자신이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459)      


인두세 납부 거부는 미국의 불의에 대해 협조하지 않으려는 소로의 비폭력 저항이며, 자신의 독립성과 고귀함을 지키려는 행위이다. 더 나아가 그는 미국의 노예제도를 비판한다. 19세기 노예제도가 여전히 존재하는 미국에서 소로는 어떻게 살아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감옥이라고 꼽는다.  

   

“부당하게 사람을 잡아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으로 있을 곳은 감옥뿐.”(461)      


소로의 정의는 바로 의롭지 않은 권력과 논리에 직접 맞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의미한다. 앞서 나의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것이다. 소로는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은 자기 삶의 완전한 소유자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다. 이런 주인에게 남이 말하는 효율과 효과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월든-이종인 옮김

이제까지 나는 나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 스스로가 나를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나를 고귀하게 여길까? 사람마다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소로는 나의 고귀함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다수의 합의보다는 개인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로의 철학을 따라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 보인다. 내 공간의 주인이 되는 게 그리 녹록지 않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래서 간디와 킹 목사와 같이 위대한 인물로 뽑히나 보다. 은둔자인 나에게 떨어진 과제는 나를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철학을 찾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로가 언급한 공자의 가르침은 꼭 기억하겠다.      


“국가가 이성적 원칙으로 다스려진다면, 가난과 비참함은 수치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성적 원칙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부와 명예가 수치의 대상이다.” (『논어』 「태백」 邦有道엔 貧且賤焉이 恥也요 邦無道엔 富且貴焉이 恥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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