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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1)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by Loxias

영화 '달콤한 인생'의 유명한 장면이 있다.


(김선우)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강사장)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이 대사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생뚱맞게 왜 영화 이야기를 꺼냈느냐고? 자, 이 장면에서 김선우를 이방원으로, 강사장을 이성계로 바꿔보자.

재밌게도 강사장을 연기한 김영철 배우는 드라마 '태종 이방원' 등에서 이성계를 연기했었다.


(이방원)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이성계)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난 이것이 조선 초기의 최고 미스터리, 도대체 왜 이성계는 이방원을 싫어했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정몽주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


일반적으로 이성계와 이방원이 틀어지게 된 계기가 정몽주 살해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원래 이성계는 정몽주까지 자신을 인정, 문무백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이상적인 그림을 꿈꿨는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여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고, 이것을 공으로 내세우는 이방원을 싫어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대세를 이룬다.

즉, 이방원이 이성계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에 다 된 밥에 무리하게 숟가락을 얹으려고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정몽주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할 당시의 상황은, 《태조실록》을 신뢰한다면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내가 왜 '《태조실록》을 신뢰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냐면, 당대의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태조실록》은 이방원이 왕위에 있는 동안 쓰였다. 당연히 이방원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사지가 들어갔을 수 있다.

다른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사》든, 《고려사절요》든 모두 다 조선 초기에 쓰였다.


아무튼 《태조실록》을 보자.

『처음에 정몽주가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조정과 민간이 진심으로 붙좇음을 꺼려하였는데,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으면서 기회를 타서 태조를 제거하고자 하여, 대간을 사주하여 말하기를, "먼저 그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그를 도모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태조의 친근하고 신임이 있는 삼사 좌사 조준·전 정당 문학 정도전·전 밀직 부사 남은·전 판서 윤소종·전 판사 남재·청주 목사 조박을 탄핵하니, 공양왕이 그 글을 도당에 내렸다.

몽주가 중간에서 이를 선동하여 조준 등 6인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고, 그 무리 김귀련·이반 등을 조준·정도전·남은의 귀양간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그들을 국문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정몽주가 이성계가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틈을 타 이성계 일파 제거 작전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양왕이 허락하지 않아 조준, 정도전 등을 처형할 수 없게 되자, 국문을 하면서 곤장을 쳐 죽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성계의 부상은 심각했던 모양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한 날이 1392년 3월 17일이고, 23일 경연에서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이 의원과 약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4월 1일 정몽주가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하고 귀양을 보내면서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 이성계는 개경으로 복귀조차 못하고 있었다.

모친상을 당해 여막살이를 하던 이방원이 소식을 듣고 이성계를 찾아가 부축하여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것이 4월 2일 밤이었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입궁하지 못했다.

『태조가 아들 이방과와 아우 화, 사위인 이제와 휘하의 황희석·조규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이방원)께서 몽주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이방과)과 이화·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를 마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방원은 여막으로 돌아가는 대신 개경에 남았고, 4월 4일 사람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했다.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태조실록》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난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는 시기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이성계가 궁에 들어가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며 상황을 정리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몽주를 죽이는 것.

그런데 이성계는 제대로 거동도 못하면서 정몽주도 죽이지 못하게 했다.

자기편 사람들의 목숨이 오늘내일하는 판국에, 그냥 손 놓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성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상대방이 칼을 빼들고 내 편을 다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판에 뭘 기다리고 지켜본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말로만 순리대로 하라고 타이르면, 정몽주가 그냥 칼을 도로 집어넣으리라고 보는가?

정몽주가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하고 귀양 보낸 순간부터 이미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이방과, 이화, 이제 등도 모두 '이성계의 허락 없이 정몽주를 죽인다면, 그 화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라며 뒷일을 걱정했던 것이지, 기본적으로 정몽주를 죽여야 할 필요성에는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이성계가 무서워 주저하고 있을 때, 이방원이 총대를 멘 것이다.


나는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가 다 된 밥에 무리하게 숟가락 얹는 행동이 아니라, 다 된 밥을 엎어버릴 대위기를 가까스로 막아낸, 정말 적절한 타이밍의 행동이라고 본다.

실제로 정몽주가 죽자 탄핵되었던 대신들은 모두 풀려났다.

이성계 역시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뭘 더 기다리겠는가?

공양왕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건국했다.


*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난 야구를 좋아한다. 이 상황을 야구에 빗대 표현해 보겠다.

이성계라는 팀의 부동의 에이스가 있다.

정규 시즌 내내 그는 팀을 이끌었으며, 맹활약하여 팀을 월드 시리즈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정규 시즌 MVP는 그의 차지였다.

이제 월드시리즈만 이기면 모든 게 완성된다. 마침 상대팀도 만만한 팀이다.


그런데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이성계가 부상을 입으며 최악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팀은 크게 뒤지며 절망에 빠졌다.

그때 이방원이라는 신예가 맹활약, 나머지 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려 팀을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다.

월드시리즈 MVP는 이방원에게 돌아갔다.


이성계가 아니었으면 팀은 월드 시리즈까지 올라올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했던 마지막 순간, 그는 경기를 망칠 뻔했다. 이걸 수습한 것이 이방원이다.

사람들이 이방원에게 이렇게 말했으리라.

"너 아니었음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네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임신년 가을 7월에 비밀히 장상들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고 태조께 개국하기를 권하여 말씀 드리는데,

조준이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여기어 동렬(同列)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공이 한 사람에게 있다." 하였으니, 태종을 가리킨 것이다.』 (《태종실록》 총서)


이런 상황에서 정규 시즌 MVP 이성계는 월드시리즈 MVP 이방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처럼 "와, 고맙다. 네가 중요한 한 방을 해줬다." 이럴까?

난 아니라고 본다.

이방원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보며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성계는 평생을 전쟁터를 누비며 빛나는 전공을 쌓았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이인임, 최영, 조민수 등 그에겐 많은 정적들이 있었지만, 모두 이성계를 당해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이성계는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상대가 과거에 자신을 따랐던 정몽주였다.


다른 정적들은 모두 이성계보다 지위가 높았으나, 정몽주는 이성계보다 아래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이인임, 최영 등에 비해 만만하게 봤을 것이고,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정몽주 역시 나가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은 적절했다고 본다.

그 상황에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였다면, 이방원의 오버질이 맞다.


그러나 이성계의 낙마 사고가 발생했다.

정몽주는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찾아오자 이를 적극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과감한 공격에 나섰다.

조준, 정도전 등을 잡아들이고 국문을 벌여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

이를 들은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이자는 이방원의 제안을 무시하고, 직접 입궁하는 대신 아들과 동생, 사위 등을 들여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아마 이성계는 정몽주가 자신의 뜻을 전해 듣는다면 물러서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칼을 뺐으니 휘둘러야 했다.


반면, 이방원은 이것을 매우 위급한 상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말이 그의 상황 인식을 말해준다.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이방원에게 이성계의 상황 판단은 너무 안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물론 이방원과 다른 이들이 이성계에게 저런 걸 대놓고 말했을 리 없다.

단, 은연중에 저런 생각들이 겉으로 드러났을 수 있다.

그게 아니어도 이성계 본인이 나중에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아, 큰일 날 뻔했구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이 이성계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이 아닐까?


난 이것이야말로 이성계가 이방원을 싫어한 진짜 이유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자기의 말을 거역하고 정몽주를 죽여 사람들로부터 욕먹게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방원이 이성계로 하여금 이불킥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을 볼 때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아버지. 제가 맞았잖아요. 아버지 말을 들었다면 우리 다 죽었을 거예요. 그렇게 상황 판단이 안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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