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조와 이순신 vs 한니발과 마하르발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전 216년 8월,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Battle of Cannae)에서 로마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로 불리며, 한니발의 전술적 천재성을 잘 드러낸다.
칸나이의 대승 이후, 한니발 휘하의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바로 로마를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한니발은 전술적 어려움을 이유로 로마 공격을 거부했다. 그러자 마하르발이 이랬다고 한다.
"당신은 승리하는 방법은 알지만, 승리를 활용하는 방법은 모른다."
로마는 한니발과 강화를 맺는 대신, 장기전에 돌입했다.
훗날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자 한니발은 구원에 나서야만 했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군하여 자마에서 스키피오와 맞붙어 패하고 만다.
나는 마하르발의 의견에 동의한다.
당시 한니발의 전략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만약 유리한 조건의 강화가 목표였다고 해도 로마를 직접 공격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도 계속 언급하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어느 한쪽의 능력이 특출 나게 뛰어난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으면, 남도 생각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면, 한니발이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전술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면, 로마에서도 최소 몇 명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을 거란 뜻이다.
기록을 보면 한니발은 로마에서 20 - 40 킬로미터 지점까지 진격하긴 했지만, 로마를 포위하지는 않았다.
한니발의 움직임에 로마 수뇌부에서는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로마를 직접 공격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 실제로 한니발이 로마를 포위, 공격하지 않았다 -> 한니발은 로마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 강화협상에 응할 필요가 없다.'
결국 한니발은 로마 수뇌부가 예상했던 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술적 불리함을 무릅쓰고 로마를 공격할 과감성이 없었다.
만약 한니발이 마하르발의 건의를 받아들여 로마를 공격하거나, 최소 포위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위협에 항복을 하거나, 강화를 맺자는 목소리가 커졌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목에 직접 칼이 닿아야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느끼고 정신이 나가는 법이다.
이순신의 경우도 한니발과 마찬가지다.
조선 수군이 해상에서 요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이순신만 알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선조를 비롯한 비변사, 그리고 일본군 장수들 모두 이순신이 전술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선봉 가토가 조선에 상륙하는 것을 양측 모두가 주목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결국 출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군은 이렇게 판단했을 수 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직접 요격하는건 무리일 것이다 -> 이순신은 가토를 요격하러 출전하지 않았다 -> 이순신은 우리를 해상 요격할 수 없을 것이다 -> 조선으로 넘어가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이순신이 훗날 명량 및 노량해전에서 목숨 걸고 싸울게 아니라 이때 목숨 걸고 싸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리함에도 출전하여 명량 및 노량해전에서 거둔 승리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성과만 거뒀다면, 하다 못해 길막이라도 했다면, 일본군은 상륙에 심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며, 실제 역사와 다른 판이 짜졌을 수도 있다.
2) 선조와 이순신 vs 사마의와 장합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읽는 '삼국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231년, 촉의 승상 제갈량은 4차 북벌을 시도했다.
당시 위나라는 대촉 방면 총사령관은 대사마 조진의 후임으로 온 사마의였다. 오랜 시간 촉과의 전선에서 활약해 온 장합은 그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다.
장합은 명장이었다. 유비가 두려워했던 장수였으며, 1차 북벌 때는 가정에서 마속을 격파했다.
위와 촉, 양군은 대치 상태에 있었는데, 제갈량이 보급 문제로 퇴각했다.
그러자 사마의는 장합에게 촉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장합은 이를 반대했다.
사마의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장합은 어쩔 수 없이 추격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촉군의 매복에 걸려 장합은 목문에서 전사했다.
《위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 군이 퇴각하자 사마선왕(사마의)이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군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선왕이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弓弩)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사마의는 장합보다 열 살가량 어렸고, 야전 경험 역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황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장합은 명령권자인 사마의의 군령을 따랐다. 군령의 지엄함이 이 정도였다.
이순신이 아무리 불리한 싸움이었다고 해도, 명백한 통수권자인 선조의 지속적인 명령에도 출전하지 않은 것은 국왕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장합이 사마의의 무리한 명령을 알고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선조의 신하로서 이순신도 같은 고민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군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3) 선조와 이순신 vs. 링컨과 조지 매클렐런
임진왜란부터 약 270년 후, 미국에서도 비교해 볼 만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 대통령 링컨과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매클렐런이다.
당시 북군과 남군은 전력차가 컸다.
링컨은 속결을 원했다. 끊임없이 매클렐런에게 남군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매클렐런은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1862년 매클렐런은 반도 전역을 일으켜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 동남쪽에 상륙하여 리치먼드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군속도가 어찌나 늦었던지, 이때 생긴 그의 별명이 "Virginia Creeper"였다. 리치먼드에 도달해서도 소극적으로 싸우다 그냥 철군해 버렸다.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의 첫 번째 북상과 관련된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매클렐런은 우연하게 리의 작전 명령서를 입수했다.
작전 명령서를 통해 매클렐런은 리의 병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중요한 작전명령이 손에 들어왔단 사실에 의심을 가졌다고 한다.
'혹시 나를 유인하려는 리의 계책이 아닌가?'
매클렐런이 공격을 주저하는 사이, 스톤월 잭슨 등이 이끄는 남군의 부대는 가까스로 리의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매클렐런은 끝까지 소극적이었다.
1862년 9월 17일 앤티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도, 버지니아로 돌아가는 리를 추격하지 않았다.
링컨이 추격을 명령했음에도 매클렐런이 수일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자, 링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해임했다.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재밌는 점은 매클렐런이 병사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단 사실이다.
이 당시 그의 별명이 "Little Mac". 그는 군사행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으며, 병사들의 처우와 복지 개선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에 더해 가능한 전투를 피하는 그의 성향도 병사들에게는 대단한 인기요인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없으니, 죽거나 다칠 위험이 줄어든다.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명장 아닌가?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매클래런은 1864년 전쟁 중에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와 링컨과 맞선다. 결국 링컨이 재선에 성공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순신과 매클렐런의 성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매클렐런의 회고록 초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 왔다. 군사 작전을 수행할 때 진정한 원칙은, 상황이 허락하는 한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예상되는 손실에 상응하는 분명한 목적 없이 결코 전투를 벌이지 않는 것이다. (It has always been my opinion that the true course in conducting military operations, is to make no movement until the preparations are as complete as circumstances permit, & never to fight a battle without some definite object worth the probable loss.)"』
매클렐런의 전장에서의 능력에는 의견이 갈리지만, 남군 총사령관 리는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이 누구였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단언컨대, 매클렐런!(McClellan, by all odds!)"
통수권자와 야전지휘관의 전략이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난 선조가 이순신을 해임한 것과, 링컨이 매클래런을 해임한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자신의 전략을 따르지 않는, 즉 말을 듣지 않는 야전 지휘관을 그냥 두는 통수권자는 거의 없다.
다만 통수권자는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선조와 링컨이 이순신과 매클래런을 해임한 후 임명한 원균과 율리시스 그랜트는 모두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랜트는 링컨의 주문대로 과감한 전략을 구사했다. 병력손실이 있더라도 계속 밀어붙였다.
리를 상대로 무리한 전투를 벌이다 보니 큰 피해가 발생했고, 그랜트는 '도살자(The Butcher)'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럼에도 링컨은 그랜트를 해임하지 않았다. 링컨은 북군이 싸우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계속해서 싸움으로써 남군의 전력을 소진시켰으며, 결국 리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원균은 무리하게 나섰다가 칠천량에서 대패한다.
이 두 사례에서 차이점이 무엇인가? 내가 봤을 때 선조는 졌고, 링컨은 이겼다는 차이 밖에 없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링컨은 성공했기에 그의 선택은 옳았다고 평가받고, 선조는 실패했기에 비난받는다.
하지만 당시의 그들은 말 안 듣는 야전사령관의 해임이라는, 본질적으로 같은 선택을 했을 뿐이다.
PGA 골퍼 필 미켈슨은 2010년 마스터즈 우승 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샷은 위험을 무릅쓸 때만 나온다. 현명한 샷은 그런 위대한 샷을 시험할 배짱이 없을 때나 쓰는 샷이지."
주제넘은 얘기지만, 필 미켈슨의 말이 내가 이순신에게 하고 싶은 말과 같다.
당시 이순신이 내렸던 결정은 '현명한' 샷이었을지는 모르나, '위대한' 샷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