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본 대로, 이순신은 1597년 1월 1일 치계에서 결연한 출전 의지를 보였고, 이후 체찰사 이원익에게도 부산 출전 계획을 설명했다.
이순신은 군령의 지엄함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싸운다고 해 놓고 출전하지 않은 것일까?
이와 관련된 기록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거행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이를 찬찬히 살펴보자.
바닷길이 험난하다는 부분. 가토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다시 넘어오려고 할 때, 이순신은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동력선이 없어 바람이 중요한 요소였다.
숙적 가토에 대한 정보를 조선에 흘린 고니시는 이 점을 우려했다.
『"이달 11일 요시라(要時羅)가 나왔는데 행장의 뜻으로 말하기를 ‘수군이 속히 거제도에 나아가 정박하였다가 청정이 바다를 건너는 날을 엿보아야 한다. 동풍이 세게 불면 반드시 거제도로 향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공격하기가 쉽지만, 만약 정동풍을 인하여 곧바로 기장이나 서생포로 향하게 되어 배가 바다 가운데로 향하게 되면 거제도와 거리가 매우 멀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라서 이 계책이 시행되지 못할 듯하니...'』 (《선조실록》 1597년 1월 19일)
류성룡 등이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만난 적이 있는데, 심유경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남쪽에 있을 때 체찰사를 만나 청정이 바다를 건너올 때 맞아 칠 것을 이야기했더니, 체찰사 역시 옳게 여겼었다. 그 후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계책은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적선이 동풍을 타고 나오는데, 이쪽에서 적을 향하려면 서풍을 타야 하니, 역순(逆順)이 달라 서로 맞서기 어려운 형세로 가령 한번 이겼다 해도 그 화는 더욱 컸을 것이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8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다.
이순신이 부산 서쪽인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일본군은 맞바람으로 인해 조선군이 공격하기 어려운 동풍을 노려 넘어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니시는 조선 수군이 거제도에 주둔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하더라도 여의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다음,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라는 부분.
1월 27일 선조와 대신들이 수군 전략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정형이 이순신을 두둔하며 했던 발언을 보자.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 데다가 적들이 천심(淺深)을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뿐더러 또 건너편 안골(安骨)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당시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고니시 역시 부산에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가토와 협력, 칼 빼들고 공격하러 나서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한다는 말인가? 그렇기에 이순신은 함부로 적의 주둔지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던 듯하다.
이에 더해, 출전 준비도 미흡했다.
『상이 이르기를, "그가 이미 통제사가 되었으니, 수군을 모아야 하는데 어째서 정돈하지 않고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겨울이면 격군을 풀어준다고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으레 10월이면 격군을 풀어주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상으로 미뤄, 가토를 도모하기 위해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선조가 가토가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후 격분해 바로 이순신을 처벌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과 다르다.
물론 선조는 분노했다. 관련 발언들을 살펴보자.
『상이 이르기를, "왜추(倭酋)는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상이 이르기를, "임진년 이후에 한 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선조만 이순신을 비방한 것이 아니었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을 이미 헌의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하고 있으니... "』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분위기가 이러하자, 류성룡마저 이순신을 비판하고 나섰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무장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몇몇 신하들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체직하고 원균으로 대체할 것을 건의했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 시켜야 할 듯합니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이때 정탁과 이정형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정탁이 아뢰기를,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정형이 아뢰기를, "원균은 사변이 일어난 처음에 강개(慷慨)하여 공을 세웠는데, 다만 군졸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경상도가 판탕된 것은 모두 원균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그런데 이에 대한 선조의 대답이 의외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 원균은 적과 싸울 때에나 쓸 만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일반적으로 선조가 원균의 참언에 속아 넘어가 이순신을 파직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혔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자.
『김응남이 아뢰기를, "인심을 잃었다는 말은 우선 치지 도외하고 주사(舟師)로 써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자기 소견대로만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체찰사가 비록 논리적으로 개유(開諭) 해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선조는 원균이 용맹하긴 하나, 능력은 이순신만 못하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의견이 좀처럼 모아지지 않자 선조가 중재안을 제시했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을 좌도 주사(左道舟師)에 임명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2인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統制使)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조절하여 절제(節制)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이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사세가 어려울 것이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다음 날인 1월 28일, 원균이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우리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한 임무를 맡고서 마음대로 기망(欺罔)하여 적을 토벌하지 않아 청정으로 하여금 안연히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바야흐로 적과 진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을 세워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나는 평소 경의 충용을 알고 있어 이제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해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鍾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 (《선조실록》 1597년 1월 28일)
선조는 이순신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줬다. 대신 조건이 달렸다. 원균과 함께 나가서 적과 싸우라는 조건.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순신을 벌하기 위한 선조의 명분 쌓기 용일뿐이라고 하는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출전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가토의 상륙을 막지 못했던 것만으로도, 선조가 이순신을 벌할 명분은 충분했다.
이때 선조가 이순신을 벌하지 않은 이유는 수군 장수 중에서 능력은 이순신이 최고인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해 보자.
가토는 이미 상륙했는데, 선조는 왜 자꾸 이순신더러 나가서 싸우라는 것인가?
선조와 비변사가 이순신의 출전을 그토록 원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왜선의 왕래가 끊임없는 부산·대마도 사이가 곧 적이 침입하는 길인데, 만약 수군의 세력이 강하여 적을 막아 끊어서 이길 수만 있다면 적장 청정이 오고 안 오는 것은 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다른 적선일지라도 한 번만 이기면 성세가 백배나 커져서, 이미 육지에 오른 적은 돌아갈 길이 끊길까 두려워할 것이고 잇달아 오는 적도 멀리서 바라보고는 겁먹고 전진하지 못할 것이니, 오늘날 계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조실록》 1596년 12월 8일)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
선조를 포함한 다수의 대신들은 수군의 우위를 이용하여 일본군이 바다를 넘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니시의 의중도 이것과 비슷했다.
『'전함 50척을 급히 기장 지경에다 정박시켰다가 좌도 수군과 합세, 결진하고 혹 5∼6척이 부산의 서로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왕래하면 우리 장수들이 속히 청정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조선이 너를 원수로 여겨 전함을 무수히 정제하여 좌우도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으며, 육군 역시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네가 나올 날을 엿보고 있으니 삼가서 경솔히 건너오지 말라. 」 한다면 청정이 반드시 의심하여 감히 바다를 통과하지 못하고 지체하는 사이에 조선에서 반드시 모든 일을 주선할 것이며, 행장 역시 두 사이에서 도모하게 되어 청정의 목은 비록 베지 못할지라도 상황은 유리할 것이니, 이보다 나은 계책은 없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19일)
여기서 전략과 전술의 차이를 짚어보자. 전략이 전술보다 상위 개념이다.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은 이유는 '전술'적 판단이다. 이순신은 불리한 싸움을 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순신의 행동은 선조와 비변사의 '전략'에 반하는 것이었다.
선조의 '전략'에 대해 설명하려면 당시 일본의 상황을 같이 봐야 한다.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재침공할 것을 명한다.
이때 일본군 주전파의 대표는 가토였다. 그러나 그조차, 이순신이 두려워 조선으로 넘어오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이순신에 대한 일본군의 두려움은 대단했다.
만약 이순신이 전술적 불리함을 무릅쓰고 출전했다면, 가토는 함부로 싸움을 걸어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가토가 이순신을 피해 조선에 상륙했다고 해도 '이순신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 금세 일본군에 퍼질 것이 뻔했다.
일본군이 두려워하는 이순신이 길목을 지키며 꼭 가토가 아니더라도 본보기로 한 번만 승전을 거두거나 피해를 입힌다면, 하다 못해 고니시의 말처럼 길목을 막아 서고 무력시위라도 한다면, 결국 일본군의 전쟁 의지를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왜 영국에 대한 봉쇄령을 내렸는가? 상륙만 하면 줘팰 자신이 있는데, 해전에서 싸우는 족족 패하니 상륙을 못해 결국 전쟁을 포기한 것 아닌가?
선조는 전략의 실행을 위해 호전적인 원균이 필요했지만, 그의 전술적 역량을 우려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이를 보완해 해상에서 적극 대응하여 자신의 전략에 부응하길 원했던 것 같다.
'어려운 건 알겠는데, 그래도 나가서 뭐라도 좀 해봐! 너 해상에서 잘 싸우잖아. 저놈들이 다 넘어오게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이것이 선조의 의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1월 13일 가토가 조선에 넘어온 이후, 2월까지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코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일본군 주요 지휘관들이 잇달아 조선으로 건너왔다.
가토가 상륙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이후 출전하긴 했으나,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특별한 성과 없이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통제사 이순신은... 갑자기 적선이 바다에 가득히 쳐들어 왔는데도 오히려 한 지역을 지키거나 적의 선봉대 한 명을 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뒤늦게 전선을 동원하여 직로로 나오다가 거리낌 없는 적의 활동에 압도되어 도모할 계책을 하지 못했으니, 적을 토벌하지 않고 놓아두었으며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반한 죄가 큽니다. 잡아오라고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고심하던 선조는 결국 이순신을 잡아 오라고 명한다.
『전교하였다. "이순신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에게 표신과 밀부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나는 선조가 이순신이 자신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따를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그를 날린 것이라고 본다.
물론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이순신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생각한 것도 맞다고 본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결과적으로 선조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나는 당시 선조와 조선군 지휘부의 전략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어쩌면 이순신은 백의종군에서 돌아와 명량 및 노량 해전에서 목숨 걸고 싸우기 전에, 이때 더 적극적으로 싸웠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