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사를 몽땅 빼고 나면 사실만 남는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형용사를 몽땅 빼고 나면 사실만 남는다."
개인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구를 적용하여 형용사를 빼고 사실만 남겨 하나의 사건을 서술해 보겠다.
- 전쟁 도중, 국왕이 수군 대장에게 출전하여 적군을 해상 요격하라는 군령을 내렸다 -> 수군 대장은 출전하지 않았고, 적군은 바다를 건너 상륙했다 -> 국왕은 수군 대장을 군령 위반의 책임을 물어 처벌했다.
이걸 읽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국왕이 수군 대장을 처벌한 것은 정당한가, 부당한가?
자, 이제 국왕을 선조로, 수군 대장을 이순신으로 바꿔 보자. 이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선조가 이순신을 처벌한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혹시 이순신과 선조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형용사의 역할을 했기 때문 아닐까?
이순신과 선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과정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근거로 나름대로 유추해 보고자 한다.
진위가 의심된다면 인터넷에 '조선왕조실록' 검색하고 들어가서 보면 된다.
1597년 1월 1일,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선조에게 보낸 비밀 장계가 사건의 시작이다.
김응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小西行長, 이하 고니시)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加藤清正, 이하 가토)의 상륙계획을 입수하고, 이를 알려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본군 장수가 바로 가토였다.
가토에 대해 조선 조정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왜적 청정이 나올 때 해상에서 요격하라는 성상의 교지는 지극히 타당합니다...
지금 성유(聖諭)에, 왜인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 먼저 바다 건너는 일을 탐지하여 처리하라는 내용이 있으니, 속히 선전관을 파견하여 비밀히 도체찰사 및 도원수 이하에게 알려서 빠른 시일 내에 비밀히 의논하여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도모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자객을 사용하는 일은 병가에서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성사만 된다면 왕자(王者)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선조실록》 1596년 12월 8일)
『이산해가 아뢰기를, "오늘날 시급히 할 일은 청정으로 하여금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만약 육지에 내려왔다면 죽기를 각오한 용감한 군사를 뽑아서 좌우에 매복시켜 그들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청정이 지나갈 때에 습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12월 25일)
조선 수뇌부가 얼마나 가토를 잡고 싶었는지 보이지 않는가?
뇌물을 주어 가토의 상륙계획을 입수토록 하며, 자객을 보내 암살하는 것까지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다.
그런 와중에 김응서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그토록 바라던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중요한 정보를 획득하자 조선 조정은 다급하게 돌아갔다.
『우부승지 허성에게 전교하기를, "대양(大洋) 싸움에서 적의 괴수를 사로잡는 일을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내 뜻은 김응서로 하여금 행장과 두터이 사귀어 어떻게든 청정을 도모하도록 하고자 하는데 이 뜻이 어떠한가? 의계하라."』 (《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비변사가 대신의 뜻으로 아뢰었다... "행장이 이로써 우리를 방심하게 하려는 계책이 아닐까 염려했으나 실정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다만 이 적이 평소 청정과 불화하여 서로 혐의를 맺고 있어서 그 말이 혹 믿을 만도 하므로 기회를 잃어선 안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선조와 비변사 모두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았다. 이것이 유인책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정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며, 절호의 기회라는 것에는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니시와 가토는 앙숙이었다.
훗날 일본의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이들을 소재로 '숙적'이라는 소설을 썼을 정도다.
둘의 관계를 조선 조정에서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랬으니 고니시에게 접근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겠는가?
고니시가 정보를 흘리자 다급했던 조선 조정에서 호들갑 떨며 앞뒤 재지도 않고 이순신에게 출전을 명했고, 이순신은 적의 정보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출전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록에 나와있는 대로 이는 실제와 다르다.
조선 측에서 고니시에게 먼저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며, 둘의 관계를 고려하여 믿을 만한 정보라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같은 날, 선조는 체찰사 이원익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급히 편의에 따라 시행하게 하되 여러 장수가 협력해서 하고 공을 다투다가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일을 성공하면 마땅히 김응서와 이순신을 함께 수공(首功)으로 삼을 것이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선조가 이순신의 이름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기록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기를,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진주하여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하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할 일이 있거든 급히 회유(回諭)를 내려주소서."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1월 1일)
아마 가토를 해상에서 요격하라는 선조의 한달 전 교지에 대한 이순신의 대답일 것이다.
어떻게 생각되는가? 이순신이 '가토의 상륙일시를 알게 되면 직접 부산으로 가서 결전을 치러 그를 잡겠다'는 뜻을 피력했다고 보이지 않는가?
선조가 먼저 나가 싸우라고 이순신을 등 떠민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선조는 생각했을 것이다.
'김응서가 성공적으로 정보를 빼왔고, 해전에 뛰어난 이순신이 출전하겠다고 했으니, 이제 가토는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 된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일이 틀어졌다.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록에는 1월 2일 이후 한동안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나오지 않는데, 그렇다고 선조가 가만히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한 신문 기사의 일부를 인용한다.
한겨레의 2022년 4월 27일 "‘이순신 항명설’ 이젠 수정돼야"라는 기사이다.
『4도 도체찰사 이원익은... 한산도에 있는 통제사 이순신과 만나 작전계획을 논하고 협의하며 수군의 작전 상황을 수시로 조정에 장계로 보고했다...
이원익의 장계는 직접 국왕에게 쓴 전황 보고서로 당시 조선 수군의 작전계획을 알 수 있는 결정적 사료다. 오리선생문집에는 이원익이 정유재란 발발 전 부산 앞바다로 출병한다는 이순신의 작전계획을 수차례에 걸쳐 선조에게 보고한 장계가 수록돼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 발발 첫날인 정유년(1597년) 1월 12일 장계에는 ‘가덕도의 동쪽 바다에 나아가 정박하여 장소포에 진을 치기도 하고 혹은 다대포의 앞바다에 진을 치기도 하면서 기회를 보아 맞아 싸운다’는 이순신의 부산 출전 계획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이 항명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원익이 선조에게 수차례에 걸쳐 장계로 보고했다는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원익이 이순신을 왜 만났겠는가? 선조는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자 이원익을 시켜 출전을 종용했을 것이다.
이원익은 이순신을 만나 계획을 물었을 테고, 그 결과를 선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수 차례에 걸쳐 보고한 장계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선조가 이순신의 출전을 원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마 중간에서 이원익도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선조는 계속 '이순신 출전 안 하냐?'라고 물어보는데, 이순신은 말로는 '출전할 겁니다.' 해 놓고 싸우러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1월 19일, 김응서의 장계가 도착했다.
『행장의 뜻으로 말하기를 ‘청정이 7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일에 이미 대마도에 도착하였는데 순풍이 불면 곧 바다를 건넌다고 한다. 전일에 약속한 일은 이미 갖추었는가?
근일에 잇따라 순풍이 불고 있어 바다를 건너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수군이 속히 거제도에 나아가 정박하였다가 청정이 바다를 건너는 날을 엿보아야 한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19일)
그리고 이틀 후, 이원익이 선조에게 가토가 이미 다대포에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기장 현감 이정견의 치보(馳報)에, 청정이 이달 13일에 다대포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는데 먼저 온 배가 2백여 척이라 하였고...』 (《선조실록》 1597년 1월 21일)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었던 작전이 실패했다. 지금까지의 서술을 바탕으로, 선조가 이순신에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다고 보는가?
출전을 거부한 이순신의 행동은 적절했다고 보는가?
아무튼 이에 대한 도원수 권율의 반응.
『도원수의 말이, '그러나 우리나라의 수군은 정돈이 되지 않아서 맞아 치지 못하였는데, 풍세가 순하지 못했음은 실로 하늘이 도와준 것인데 인사(人事)를 닦지 못하여 앉아서 기회를 잃었으니 분개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다.
행장 역시 매우 통분해하면서 「그대 나라 일은 매양 그러하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청정이 이미 바다를 건너왔으니, 전날 내가 한 말이 청정의 귀에 누설될까 걱정된다. 모든 일을 비밀이 하도록 힘쓰자. 」 하고...
대개 우리나라의 일은 이처럼 지체하여 만에 하나도 성사될 수 없으니, 다만 민망하고 답답할 뿐이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