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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2)

by Loxias Mar 09. 2025

* 정도전의 역할에 대한 생각


흔히 조선 왕조의 진정한 설계자는 정도전이라고 말한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용했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나라를 꿈꿨는데, 절대 왕권을 추구하는 이방원이 간계를 부리는 바람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절친 정몽주를 죽인 것도 모자라, 권력욕에 불타 폭주하는 이방원을 정도전은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난 과감히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참모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선 건국 전까지 정도전은 이성계의 '온리 원'이 아니었다. '원 오브 뎀'이었다.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참모가 곽가 하나뿐이었나? 아니다. 순욱, 순유, 정욱, 가후 등 기라성 같은 참모들이 많았다.

정도전은 '원 오브 뎀' 중에서 1등도 아니었다.

조조의 참모 중에서 순욱의 공이 으뜸이었듯, 실제로 조선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공적만 놓고 보자면 조준이 정도전보다 위였다.

창왕 즉위 이후 조민수를 탄핵한 것도 조준이었으며, 고려 말기에 시행된 각종 개혁 등도 모두 조준이 주도했다.

《태조실록》 1392년 8월 20일, 개국 공신들의 위차(位次)를 정하는 부분에 대한 기록을 보자.

『문하 좌시중 배극렴·우시중 조준·문하 시랑찬성사 김사형·정도전·흥안군 이제·의안백 이화·참찬문하부사 정희계·이지란·판중추원사 남은·지중추원사 장사길·첨서중추원사 정총·중추원 부사 조인옥·중추원 학사 남재·예조 전서 조박·대장군 오몽을·정탁 등은 천명의 거취와 인심의 향배를 알고, 백성과 사직의 대의로써 의심을 판단하고 계책을 결정하여, 과궁을 추대하여 대업을 함께 이루어 그 공이 매우 컸으니...』

조준이 두 번째, 정도전이 네 번째로 등장한다.

이런 중요한 문서에서 이름의 등장 순서 잘못 쓰면 난리 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정몽주의 죽음과 조선 건국 이후, 정도전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다.

《월간조선》 2023년 2월호, '조선 재상 열전, 조준전'을 참고한다.

『개국 직후 태조는 계비 강씨의 아들 이방번을 세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좌시중 배극렴, 우시중 조준, 김사형, 정도전, 남은 등을 불러 토의했다. 먼저 배극렴이 말했다.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을 통하는 마땅함입니다.”

이에 태조는 불쾌해했다. 조준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이에 강씨가 울부짖었고 태조는 조준에게 붓과 종이를 주고서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했으나 조준은 땅에 엎드려 끝내 쓰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방석으로 정해졌다.』

조준의 발언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는 뜻이다.

이성계가 붓과 종이를 들이밀면서까지 조준을 압박했지만,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이때를 기점으로 조준을 제치고 정도전이 이성계의 픽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픽이냐고?

이성계는 자신을 대신하여 이방원과 그의 세력을 견제할 사람으로 정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마치 조조가 자신의 위공 즉위에 반대한 순욱을 버리고, 순유를 상서령에 앉혔던 것처럼 말이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의 나라는 포장은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본인이 왕 노릇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했는데, 정작 왕위에 오르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에 가만히 있는다?

이성계의 권력 의지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그보다는 이성계가 조준의 마음이 이방원에게 있음을 알게 되자, 그를 제치고 정도전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리고 이성계가 직접 이방원을 괴롭히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들이 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한 건데, 그거 가지고 애를 저렇게 미워하고 괴롭히다니!'

이성계는 자신이 먹을 욕을 분산시키면서 이방원을 견제할 목적으로 정도전을 픽해서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정도전이 자신의 절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을 미워했다고 하는데, 난 솔직히 이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이색의 제자들이니 어느 정도 친하기는 했겠지만, 정도전의 정몽주에 대한 우정이 그렇게 깊었을까?

설령 그 전에는 둘이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해도, 정몽주가 죽을 당시에 둘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정몽주가 정도전, 나아가 이성계 일파와 멀어지게 된 전말을 자세히 살펴보자.


* 엄청난 나비 효과, 윤이·이초 사건


이성계 일파와 정몽주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이때 명분이 바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씨, 신돈의 후예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폐가입진. 공양왕이 즉위하고 명나라에 보낸 글이 《고려사》에 나온다.

『홍무 22년 11월 15일에 대소 종척·신료·한량·기로 등이 삼가 성지의 뜻을 받들어 나라에 대해서 함께 의논하더니, ‘공민왕이 아들이 없이 훙서한 뒤로 권신 이인임 등이 세운 신우 부자는 사실 다른 성씨여서 왕씨의 제사를 주관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서는 신이 종족 중에서 가장 〈촌수가〉 가깝고 연장자라 하여 공민왕비 안씨의 명을 받들어 신에게 임시로 나라를 다스려 제사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공양왕이 즉위하자 창왕 즉위를 주장했던 조민수, 이색 등이 공격을 받아, 이색 부자는 유배된다. 《고려사》 1389년 12월 5일의 기록이다.

『간관이 우왕과 창왕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또 이색·이인임 등의 죄를 논하여, 이인임의 집을 못으로 만들고, 이색 부자 및 이숭인·하륜·환관 이분을 유배 보냈으며, 조민수를 삼척으로 옮겼고, 권근을 김해로 옮겼으며, 문달한의 직첩을 거두었다.』


1390년 5월, 훗날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윤이·이초 사건이다.

고려 사람 윤이와 이초가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고려사》 1390년 5월 1일의 기록이다.

『5월 계사 초하루 왕방·조반 등이 명의 수도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예부에서 신들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나라 사람 중에 윤이·이초란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와서 황제께 하소연하며 「고려 이 시중이 왕요를 임금으로 세웠는데, 왕요는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입니다.

왕요와 이성계가 군대를 동원하여 상국을 범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재상 이색 등이 안 된다고 하니, 이색 등 10인을 살해하고 우현보 등 9인을 먼 곳으로 유배시켰습니다.

지금 유배된 재상들이 몰래 우리들을 보내어 천자께 고합니다.」하고 친왕께서 천하의 병사를 동원하여 토벌해 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1390년 11월이 되어서야 일단락된다. 《고려사》 1390년 11월 23일의 기록이다.

『정당문학 정도전 등이 경사(명의 수도)에서 돌아왔는데, 선유성지에 이르기를, “윤이·이초가 너희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한 일을 짐이 이미 믿지 않았고 이미 단죄하였으니, 너희 나라가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도전은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된 이색과 우현보의 처형을 주장한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에서 찾을 수 있다.

『가만히 보면 형벌 중 가장 큰 것은 왕위를 찬탈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왕씨를 저해하고 〈우왕의〉 아들인 신창을 왕위에 올리며 신우를 맞이하여 왕씨를 끊으려는 것은 찬탈하는 것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며 난신적자 가운데 으뜸입니다...

‘이른바 죄인 가운데는 유자의 으뜸인 사람이 있고 또 왕실과 연이어 혼인으로 맺어진 사람도 있으니 그 법에 논의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난신적자는 친소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여서 〈후사를〉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몽주는 이색의 처형에 반대했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의 일부이다.

『이색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하여 말하기를, “무진년에 여러 장수들이 회군한 후에 왕씨를 옹립하기로 의논하고 이색에게 계책을 물었다... 이색이 실로 겁을 먹고 나약하였으므로,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옹립하는 것이 국가의 상례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창을 옹립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죄가 용서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다만 이색은 절조가 없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색·우현보 등을 석방시켰는데.. 정몽주가 왕에게 법령으로 삼아주기를 아뢰며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 만약에 위의 항목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로 논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아마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일파는 이 대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꿔 이색, 우현보 등 반대 세력을 일망타진키로 결정한 듯싶다.

더 나아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공양왕이 이색, 우현보 등을 시켜 명나라에 공작을 벌이고, 황제의 명을 핑계 삼아 우리를 처치하려 한 것 아냐? 그러니까 저렇게 처벌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공양왕을 편들고 나온 것이 정몽주다.

정몽주가 공양왕을 편든 이유는 무얼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왕을 압박하고 나서는 이성계 일파가 꼴 보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공양왕의 이성계 일파 제거 작전에 함께 했을까?

그리고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석에 눕자 정몽주는 정도전을 죽이려 했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에 나오는 기록이다.

『정몽주가 간관 김진양 등을 사주하여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의 지위를 훔쳤으며 미천한 근본을 감추려고 본래의 주인을 제거하고자 꾀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일을 이룰 수 없자 그럴싸한 죄를 엮어내어 많은 사람에게 연좌시켰습니다.

청컨대 유배된 곳에서 형벌을 주어 뒷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정도전이 이것을 알고 격노했다고 한다.


아무리 예전에 절친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정적인 데다, 그에 더해 상대방이 먼저 나를 죽이겠다고 나섰으며, 그야말로 진정한 모욕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로서 좋아하고 아낀다?

이건 호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난 드라마의 연출처럼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왜 정몽주를 죽였느나며 비난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로 미뤄 짐작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은 재상 중심의 나라냐 왕 중심의 나라냐 하는 헤게모니 싸움도 아니고, 비명에 간 절친한 친구의 복수라는 그런 거창한 이유도 아니었다고 본다.

그저 이성계의 픽을 받은 정도전이, 정몽주 살해를 주도함으로써 조준을 비롯한 대신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이성계에게는 제대로 찍힌 이방원과 펼친 권력 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맺음말


마지막으로 이방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이방원이 이성계가 자신의 공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자신을 오해하고 미워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그 분노가 아버지의 눈을 가리고 자신을 탄압하는 정도전에게로 향했고, 결국 그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역시 실제와 달랐을 거라고 본다.

처음에는 몰랐을 수 있지만, 이방원도 나중엔 이성계의 마음을 눈치챘을 거라는 얘기다.

난 개인적으로 이방원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다.

이방원 정도 되는 사람이 이걸 깨닫지 못했을 리 없다.


영화에서 김선우는 강사장이 자기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정말로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강사장의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대답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리라.

반면, 이방원은 이성계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정도전과 동생들을 죽이고 이성계를 찾아간 이방원이 묻는다.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봐요."

이성계가 대답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 말에 이방원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영화 '내부자들'의 한 대사를 인용한다.


"그러게 그때 잘하지 그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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