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넘버 쓰리래, 내가 넘버 투야!
영화 '넘버 3'를 기억하는가?
아주 오래된 영화인데 (찾아보니 1997년 영화다), 주인공 한석규 분이 폭력조직의 넘버 3, 서태주로 나온다.
옛 친구 단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유명한 장면.
(단칼) "너나 나나 이만하면 많이 큰 거야. 난 도끼파 넘버 투, 넌 도강파 넘버 쓰리."
(서태주) (숟가락을 식탁에 내던지며) "에이씨, 어떤 새끼가 넘버 쓰리래? 내가 넘버 투야."
이 대사가 딱 어울리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누구냐고?
조민수다. 모르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성계와 같이 명나라 정벌한다고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 그 사람!' 하는 정도랄까?
워낙 존재감이 없다 보니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에게 굴복해서 찍소리 못하고 끌려다니다가, 혹은 이성계에 묻어갔다가, 훗날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인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당시 원정군 편제상 조민수가 이성계보다 위였다.
조민수는 좌군도통사, 이성계는 우군도통사였는데, 조선시대에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위였듯이, 이때도 조민수가 이성계보다 위였다.
"그래? 당신이 넘버 쓰리 아니었어?"
"에이씨, 어떤 새끼가 넘버 쓰리래? 내가 넘버 투야."
참고로 넘버 원은 최영이다.
당시 국왕인 우왕과 최영은 후방에 남고, 넘버 투와 넘버 쓰리만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한 것이다.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은 요동에는 가지도 않고 위화도에서 버티다가 회군한다.
* 위화도 회군에서 조민수의 역할
《고려사》 1388년 5월 기록을 기록을 보면 '조민수, 이 사람 넘버 투가 맞나?' 싶을 정도의 찌질함과 존재감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날 군중에 ‘태조(이성계)가 휘하의 친병들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하였는데 이미 말에 올라탔다.’는 와언이 돌아 군중이 흉흉하였다.
조민수가 어찌할 바를 몰라 홀로 말을 타고 태조에게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공이 가시면 저희들은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어디를 간다는 것입니까? 공은 이와 같이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는 기록도 나온다.
『드디어 여러 장수들을 일깨워 말하기를, “상국의 경계를 범한다면 천자에게 죄를 얻는 것이요, 종사와 백성들의 화가 곧 닥칠 것이다.
내가 옳고 그른 것을 가지고 글을 올려 회군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않고, 최영도 노망이 나서 듣지 않는다.
그대들과 함께 임금을 뵙고 직접 화복을 아뢰고 임금 곁의 악을 제거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회군 후에도 조민수는 개경 공방전에서 최영의 군대에 패하는 등, 넘버 투에 어울리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민수는 흑색 대기를 세우고 태조는 황색 대기를 세웠다.
흑색 기가 영의서교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조금 후에 황색 기가 선죽교로부터 남에 오르니, 최영의 휘하 안소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도망해 갔다.』 《태조실록》
그런데, 의심해 봐야 할 것이 있다.
저랬음에도 불구하고 위화도 회군 이후, 조민수는 여전히 이성계보다 위였다.
『우왕이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삼고, 태조를 우시중으로 삼았다.』《태조실록》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기록상으로 보면 조민수는 위화도 회군 과정에서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가 이성계보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 도대체 왜?
단지 출전 당시 편제가 위였다는 이유만으로?
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이것이라고 본다.
조민수는 위화도 회군에서 단지 '들러리'가 아니었다.
* 반역 = 가족의 몰살
《태조실록》, 《고려사》 등의 기록은 조선이 세워지고 쓰인 것이기에 이성계와 관련된 기록은 잘 살펴봐야 한다.
이성계가 회군한다는 소식에 조민수가 울며 달려갔다는 기록은, 훗날 마사지가 들어간 것이리라.
기록대로 위화도 회군이 '넘버 쓰리' 이성계의 결정이고, '넘버 투' 조민수를 비롯한 다른 무장들은 그 뜻에 따른 것일 뿐이라면 이후의 사건 전개가 잘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태조실록》의 다음 기록들을 보자.
『조전사 최유경이 대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알렸다.
이날 밤에 상왕(이방과)이 그 형 방우와 이두란의 아들 화상 등과 함께 성주의 우왕의 처소로부터 태조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우왕은 해가 정오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전하(이방원)가 왕후와 강비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전하께서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 가지고 봉양하였다...
이천의 한충의 집에 이르러서 가까운 마을의 장정 백여 명을 모아 항오를 나누어 변고를 대비하면서 말하기를,
"최영은 일을 환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나를 뒤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성계가 출전했을 때 장남 이방우, 차남 이방과 등이 볼모가 되어 우왕에게 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들을 볼모로 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히 협박의 목적이다.
'생각 잘해라. 네가 딴마음먹고 말머리 돌리는 순간, 네 가족들은 다 저세상 사람 되는 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병권을 가진 외군사령관의 가족을 볼모로 잡아 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와 관련된 사례를 두 가지 들어 보겠다.
- 로마의 네로 황제가 자살하고 여러 황제가 난립하던 혼란의 시기, 유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제위에 오를 것을 선언했다.
당시 그의 장남 티투스는 함께 종군하고 있었으나, 차남 도미티아누스와 집정관을 지낸 그의 형 사비누스는 로마에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비텔리우스 세력에 의해 사비누스는 붙잡혀 죽임을 당했고, 도미티아누스는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 명청 교체기,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는 산해관을 지키며 청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켰다.
이자성군은 오삼계의 가족을 붙잡았고, 오삼계에게 이를 알리면서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고민하던 오삼계는 결국 이자성을 버리고 청군과 손을 잡았다.
이자성군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을 처형했다.
우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가족을 볼모로 잡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 정벌에 대단히 부정적이었고, 이는 다른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 1388년 3월의 기록이다.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죽였다.
처음에 최영이 우왕에게 요동을 공격할 것을 권하자 이자송이 최영의 집으로 가서 힘써 불가함을 이야기하였는데, 최영은 그가 임견미의 당에 붙었다 여기고는 장 107대를 쳐서 전라도의 내상으로 유배 보내려 하였다가 조금 뒤에 죽였다.』
요동 정벌에 반대하는 대신을 본보기로 죽였다는 것은, 그만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저 정도 조치도 하지 않는다면, 뭘 믿고 수만 명의 군대를 맡겨 원정을 내보낸단 말인가?
그리고 이건 이성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성계뿐만 아니라, 좌군도통사인 조민수, 그리고 휘하 주요 지휘관들의 가족들도 다 볼모로 잡았을 거란 얘기다.
앞으로 계속 언급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국가 시스템은 그렇게 허술하거나, 만만하지 않다.
저런 상황임을 이해하고 다시 생각해 보자.
까딱 잘못 했다간 가족들이 다 잡혀 죽게 생겼는데, 조민수가 그런 결정을 그저 이성계가 두려워서 했다고?
그리고 아무리 직속상관이 요구한다고 해서, 반란에 가담하는 순간 자기 가족이 다 죽을 걸 뻔히 아는데, 휘하 무장들이 그렇게 쉽게 이성계를 따를 수 있다고?
난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선 《태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의 가족들은 모두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가?
이방원의 말처럼 '최영이 일을 환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자면 그만큼 이성계가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했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전에 가족들 간 이 정도 얘기는 되어 있었을 것이다.
'회군할 수도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가 소식이 들리면 잽싸게 튀어라.'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대기하며 철군을 준비하는 한편,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 도망치라고 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원정군이 위화도에 도착한 것이 1388년 5월 7일이고, 회군을 결정하고 말머리를 돌린 것이 5월 22일이다.
15일 남짓 동안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에게 회군을 요청하고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기록에 나오듯 이성계의 가족들은 도망쳤고, 아마 이성계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럼 조민수를 비롯한 다른 무장들의 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태조실록》 등에는 이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기록이 나온다.
『처음에 최영이 영을 내려 정벌에 나간 여러 장수들의 처자를 가두고자 하였으나, 조금 후에 일이 급박하여 과연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성계뿐만 아니라 다른 지휘관들의 가족도 모두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난 이렇게 해석한다.
조민수와 이성계를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 사이에 '회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어떻게든 가족들을 빼돌리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