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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2)

by Loxias Mar 19. 2025

* 개경에서 벌어진 일


위화도 회군의 소식이 우왕에게 전해진 것은 5월 24일이었다. 당시, 우왕과 최영은 개경에 없었다.

1388년 4월 3일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원정을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고, 원정군이 평양을 떠난 것이 4월 18일이었다.

우왕은 평양 부근 성주에서 회군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귀환, 5월 26일에는 평양에, 5월 29일 아침에 개경 도성에 도착했다.

최영은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 우왕과 같이, 또는 약간 앞서 개경에 도착했을 것이다.

개경에 도착한 우왕과 최영은 원정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최영이 방어하여 싸우려고 백관에게 명하여 병사와 무장으로 시위하게 하였다.』


원정군은 이들보다 늦게 개경 근교에 도착, 1388년 6월 1일 우왕에게 최영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지금 최영이 총재가 되어, 조종 이래로 사대한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군을 일으켜서 장차 상국을 침범하려 하였으니...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를 뒤집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인 6월 2일, 우왕은 이를 거절하는 교지를 내리는 한편, 조민수 등의 관작을 삭탈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6월 3일, 회군 세력은 도성을 공격했다.

이들은 도성 수비군을 제압하고 우왕과 최영이 머무르던 화원을 포위했다.

『우왕이 영비 및 최영과 함께 팔각전에 있었는데, 최영은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니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 보내었다.』

최영이 쫓겨나고 조민수, 이성계 등은 모두 복직되었다.

『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우리 태조를 우시중으로 삼았으며, 조준을 첨서밀직사사 겸 대사헌으로 하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직시켰다.』


그리고 일시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일의 순서를 고려해 보면 6월 4일로 추측된다.

『여러 장수가 성으로 들어와 흥국사에서 회의한 뒤 여러 도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징집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안소·정승가를 붙잡아 순군에 가두었다.

전교부령 윤소종이 군영 앞에 와서 정지를 통하여 우리 태조를 보기를 청하고 「곽광전」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으니, 조인옥이 힘을 다해 다시 왕씨를 세우자는 의견을 펼쳤다.』

6월 5일, 회군 세력은 최영 휘하 무장들을 모두 유배를 보냈다.

『여러 장수가 성으로 들어와 지장사에서 회의한 뒤 최영을 합포로 옮겨 유배하고 송광미는 원주로, 안소는 안변으로, 정승가는 영해로, 판밀직 인원보는 함창으로, 동지밀직 안주는 봉주로, 지밀직 정희계는 음죽으로 유배 보내었다.』


그런데 6월 6일 밤, 우왕이 환관들과 함께 군사행동을 감행하나 실패했다.

『우왕이 밤에 환관 80여 인과 함께 모두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 및 조민수·변안열의 집으로 들이닥쳤으나 모두 문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어 집에 없었기 때문에 해를 입히지 못하고 돌아왔다.』

솔직히 우왕이 왜 조민수, 이성계의 집을 습격했으며, 이 습격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성계 측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며, 왕위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반격을 시도했던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무장들이 집에 없다는 기초적인 첩보조차 없는 상태에서 움직였단 말인가? 


6월 8일, 결국 우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강화로 향했다.

『처음에 여러 장수들이 영비(최영의 딸)를 내쫓을 것을 청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만약 이 비를 내쫓으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나와서는 채찍을 잡고 안장에 기대어 말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구나.”라고 하였다.

좌우가 엎드려 눈물을 흘렸으며,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 및 연쌍비와 함께 회빈문으로 나와 강화로 향하였다.』


6월 9일, 우왕의 아들 창왕이 즉위했다.

이때, 이성계 측은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 우왕은 신돈의 아들이므로 가짜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조민수가 정비의 교지로 우왕의 아들 왕창을 세웠다.

태조가 회군할 때 조민수와 함께 왕씨의 후손을 다시 세우기로 의논하자 조민수 또한 그렇게 여겼었다.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왕씨의 후손을 택하여 세우고자 하니, 조민수가 이인임이 천거하여 선발해 준 은혜를 생각하여 이인임의 외형제인 이림의 딸 근비의 아들인 왕창을 세우고자 꾀하였는데...

태조가 조민수에게 말하기를, “회군할 때 하였던 말은 어찌 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조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원자를 세우는 것은 한산군이 이미 계책을 정해놓았으니, 어떻게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기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위화도 회군 시 이성계가 무장들을 설득하며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보자.

최영을 몰아내자고만 했지, 우왕을 쫓아내자는 말은 없다.

최소한 6월 3일까지 우왕을 쫓아내자는 말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우왕에 퇴위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나오는 것이 6월 4일이다.

『조인옥이 힘을 다해 다시 왕씨를 세우자는 의견을 펼쳤다.』 

그러면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한 말, “회군할 때 하였던 말은 어찌 된 것입니까.”는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란 말인가?


* 창왕 즉위의 진정한 의미


지금부터는 정말 추측해야 한다.

시작은 공민왕 치세이던 13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71년 7월 9일,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 보내면서 측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신돈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여종을 총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놀라게 하지 말고 그를 잘 보호하여라.”라고 하였다.

아들은 바로 모니노이다.』

그리고 7월 18일, 신돈의 집에서 모니노를 데려와 태후전에 살게 했다.

2년여가 지난 1373년 7월 6일, 공민왕은 모니노를 강녕대군에 봉한다.

『모니노에게 우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으로 봉하니, 백관이 하례하였다.

정당문학 백문보·전녹생, 대사성 정추 등을 (우왕의) 사부로 임명하였다.』


지금이야 친자 확인이 가능하지만, 그 옛날에 친자 확인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왕이 정말 공민왕의 아들인지, 아니면 신돈의 아들인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민왕 본인이 직접 우왕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대군으로 봉했다는 점이다.

1374년 9월 22일, 공민왕이 시해되었다. 즉, 공민왕은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차기 왕을 정하는 자리에서 태후와 시중 경복흥은 종친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시중 이인임은 우왕을 세우고자 했다.

두 세력 간 의견이 맞서다 결국 이인임의 뜻대로 우왕이 왕위에 오른다.

이를 두고 《고려사》 등에서는 이인임이 정통성이 부족한 어린 왕을 앉히고 본인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 그랬다며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이인임을 비판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왕이 아니라면 종친 중에 누굴 세운단 말인가?

공민왕이 생전에 일언반구도 없었던 종친을 데려다 왕을 세웠으면 반발이 없을까?

나는 우왕을 왕위에 앉히는 것이, 당시 가장 후폭풍이 작았을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인임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었다.


《고려사절요》 1374년 9월 25일의 기록이다.

『영녕군 왕유, 밀직 왕안덕 등이 이인임의 뜻에 맞추어 크게 말하기를, “왕께서 대군을 후사로 삼으셨는데, 그를 버려두고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하는 이색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에는, 정도전이 이색을 탄핵하면서 그가 했던 말을 인용한 부분이 실려 있다.

『이색이 말하기를, "신우가 비록 신돈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현릉(공민왕)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서 강녕대군으로 봉하였으며 또한 천자의 고명을 받아 임금까지 되었다.

또한 이미 신하가 되었으면서 그를 내쫓는 것은 크게 옳지 않다."라고 하였는데...』


이인임이나 이색의 주장처럼, 공민왕이 직접 우왕을 자기 아들이라고 하면서 대군에 봉했는데, 뭐가 더 필요한가?

이번에도 '삼국지'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위나라 황제 조예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죽기 전 출신을 알 수 없는 조방을 양자로 데려와 황태자로 삼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선택된 후계자, 조방과 우왕에게 정통성이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나이도 어렸다.

우왕은 왕위에 오를 당시 10살, 조방은 불과 6-7살에 제위에 올랐다.

조예도, 공민왕도 이 부분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힘 있는 대신에게 뒷일을 부탁, 즉, 친위 세력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조예는 조상과 사마의를 탁고 대신으로 삼아 조방을 부탁했다.

공민왕은 유언을 남기지 못했지만, 난 이인임이 그 역할을 맡았던 거라고 본다.


이인임은 권력을 독점했을지언정, 우왕의 자리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탁고 대신으로서 우왕의 친위 세력 역할은 제대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인임은 그 과정에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최영, 이성계 등 군부의 주요 장수들이 모두 적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결국 1388년 1월, 이인임을 비롯한 임견미, 염흥방 등이 실각했다.


이인임이 제거되자, 우왕은 본능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인임 대신 자신을 지켜줄 친위 세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때 우왕이 픽한 것이 바로 최영이다. 고려 군부 넘버 원.

《고려사절요》 1388년 3월의 기록이다.

『우왕이 최영의 딸을 맞아들였다.

처음에 우왕이 최영의 딸을 맞아들이고자 사람을 시켜 말하니 최영이 불가하다고 하며 말하기를,

“신의 딸은 비루하고 또한 정실의 소생이 아니라 항상 측실에 두었으므로 지존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들이고자 하신다면 늙은 신하는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고, 눈물을 흘리며 굳게 거절하였다.

휘하의 정승가·안소 등이 우왕의 뜻에 영합하여 마침내 최영의 뜻을 꺾었다.』

최영은 자기 딸이 정실 소생이 아니므로 우왕의 왕비가 될 수 없다고 하는데도, 우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위화도 회군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내 생각에, 원정군 내에는 우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세력과, 이것을 부정하는 세력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인간사 그 어디에도 100% 찬성, 100% 반대는 없다. 선거에서 60% 득표하면 압승이라고 하는 이유다.

그랬기에 이성계가 우왕을 내쫓자고 여러 무장들에게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기록에서 보면, 이성계는 조민수에게는 우왕을 교체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조민수도 알겠다고 했던 것 같다.

조민수의 본심도 그랬는지, 아니면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그냥 넘어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6월 4일 이성계 세력이 우왕을 끌어내릴 것을 주장했을 때, 당연히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나왔을 것이다.

"나는 분명 최영만을 제거한다고 해서 함께한 것이다. 갑자기 왜 우왕을 쫓아낸단 말인가!"

위화도에서는 이대로 국경 넘어갔다간 큰일 난다는 생각에 모두가 합의해서 말머리를 돌렸지만, 도성을 장악하고 나니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고 조민수와 이색은 우왕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즉 친위 세력의 양대 주축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왕은 왜 왕위에서 물러났느냐?

난 여기에서 과감하게 주장한다. 우왕은 완전히 왕위에서 물러난 게 아니라, 잠시 은퇴했던 것이다.

마치 현대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물의를 일으켰을 때, 한동안 자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요동 정벌이라는 잘못을 저지른 우왕을 그냥 뒀다가, 만약 명에서 원정군을 파견하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 아닌가?

정통성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땐 이성계 일파에게 빌미를 줄 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했다.

이 상황에서 조민수와 이색이 타협안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우왕의 양위와 창왕의 즉위라고 본다.


왜 이렇게 생각했냐고?

《고려사》 1388년 7월의 기록인데, 창왕 즉위 이후 우왕의 이름으로 주원장에게 보낸 표문이 근거이다.

『근래에 최영이 권신인 임견미 등을 죽이고 마침내 문하시중이 되니, 제멋대로 군국의 권한을 휘둘러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고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요양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조심스레 생각건대 최영이 여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신의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렇게 망하게 된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신은 본디 어릴 때부터 병이 있는데 나랏일은 번다하니,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휴양하기를 원합니다.

삼가 신의 고조인 충렬왕 왕거, 증조인 충선왕 왕원, 조부인 충숙왕 왕도 3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에 의거하여, 홍무 21년(1388) 6월 초8일에 신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임시로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 신의 망령된 행위를 용서하시고,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믿어주시어, 신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은혜로운 명을 얻어 신의 명작을 계승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 표문에서 중요한 문구가 등장한다.

'휴양하기를 원합니다,' '왕도 3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에 의거하여', '신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임시로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이 문구를 근거로 난 당시 조민수와 이색 일파의 계획을 이렇게 추정한다.

- 요동 정벌을 시도한 잘못은 최영에게 모두 뒤집어 씌운다.

- 우왕 역시 병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한 책임을 지고 아들 창왕에게 양위하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 시간이 지나 잠잠해지면 우왕이 병이 완치되었다면서 왕위에 복귀한다.


지금의 시각에서야 왕위에서 물러났다가 복위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표문에 나와 있듯이 불과 얼마 전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되어 있을 때 이런 경우가 있었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으로 이어지는 4대 동안,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의지에 따라 양위와 복위를 반복했다.

이게 전혀 허황된 계획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나는 이 타협안으로 우왕 찬성파를 설득시켰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성계 세력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반대했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우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잘 대접받았다.

1388년 8월에는 추석이라고 도당에서 우왕에게 옷과 술을 보냈다.

이듬해엔 우왕의 생일이라 하여 죄수를 사면하고, 이성계가 직접 우왕을 찾아가 잔치를 열기도 했다.

《고려사》 1389년 7월 7일의 기록이다.

『우왕의 생일이었으므로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우리 태조(이성계)와 판삼사사 심덕부, 판개성부사 배극렴, 문하평리 정지 등이 황려부에서 우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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