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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3)

by Loxias Mar 25. 2025

* 창왕 즉위, 진짜 싸움의 시작


조민수와 이색을 대표로 하는 세력은 우왕을 물러나게 하고 창왕을 왕위에 앉히는 데까진 성공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주원장의 승인이었을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이성계 일파를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봐라, 주원장이 창왕을 인정했다. 됐지?"


이색은 주원장을 만나러 직접 명의 수도(남경)로 가기까지 했다.

《고려사절요》 1388년 10월의 기록이다.

『시중 이색, 첨서밀직사사 이숭인을 경사에 보내 신정을 하례하고 왕관(王官)이 감국할 것을 청하였으며...

현릉이 훙서하면서부터 천자가 항상 집정대신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가지 못하였는데, 이색은 재상이 되자 입조할 것을 자청하였고...』 

그리고 1388년 11월, 이번에는 창왕이 직접 명의 수도로 가서 주원장을 알현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밀직사 강회백과 부사 이방우를 경사로 보내어 조현을 청하였다.』

표문의 내용은 한숨이 날 지경이다.

황제의 감독관을 고려에 파견하여 나라를 감독해달라고 하고, 일국의 왕이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를 떠나 황제를 만나러 간다는 건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다. 요즘 말로 '이게 나라냐?' 한탄할 정도란 얘기다.

오죽 다급했으면 저런 생각까지 했으랴.   


강회백은 1389년 3월 고려에 돌아왔는데, 그가 들고 온 주원장의 성지는 창왕 세력이 원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이제 신하들이 아버지를 내쫓고 그 아들을 세우고서는 조회하러 오고자 청하니, 대개 인륜이 크게 무너지고 군주의 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신하답지 못한 역심이 크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사자를 타일러 돌아가게 하고 어린아이는 조회하러 올 필요가 없다고 하라.

왕으로 세운 것도 저들에게 달린 것이고, 폐하는 것도 저들에게 달린 것이니, 중국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원장은 창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주원장은 두 명의 고려 왕을 책봉했는데,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시해되었고 우왕 역시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황제의 위엄을 무시한 고려의 대신들에게 화가 났을 수도 있으며, 사정이야 어찌 됐든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던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에 대한 의심도 거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성지는 6개월 후에 닥칠 핵폭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389년 9월, 말 그대로 주원장의 핵폭탄이 떨어졌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고려는 나라 안에 일이 많아 배신이 된 자들 중에 충신과 역신이 섞여 있으니 그 행위가 모두 좋은 계책이 아니다.

임금의 지위가 왕씨로부터 시해를 입어 후사가 끊기었으며, 후에 비록 왕씨를 가장하였으나 이성(異姓) 왕이 되었으니, 이것도 삼한에서 대대로 지켜온 좋은 법이 아니다...

예부에서는 어린 왕에게 공문을 보내 경사에 오지 말라고 하라.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제 자리에 있어 위로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정하고 나라에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마련한다면, 비록 수십 년 동안 입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해마다 입조한다고 한들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또한 처녀도 보내지 말라고 명하라.’라고 하시었습니다.』


주원장이 우왕과 창왕을 이성(異姓)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둘의 정통성은 주원장의 이 성지 하나로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 '과연 현명하고 지혜로운 배신이 제 자리에 있어 위로 임금과 신하의 명분을 정하고'.

이것은 이성계더러 제대로 된 임금을 세우라는 대의명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왕 역시 심각함을 인지했다.

《고려사》 등에 1389년 11월, 우왕이 이성계를 죽이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왕은 최영의 일족인 김저와 정득후가 자신을 찾아오자,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으면서 속수무책으로 죽어야 하겠는가?...

한 명의 역사(力士)만 얻어 이 시중을 해치기만 한다면, 내 뜻이 이루어질 만할 것이다.

내가 본디 예의판서 곽충보와 잘 지냈으니, 너희들은 가서 그와 도모하라.”고 하며 곽충보에게 검 한 자루를 남기며 이르기를, “이번 팔관회 날이 거사할 만하다..."』

김저는 곽충보를 찾아갔고, 곽충보는 겉으로는 승낙하는 듯 하고서는 이성계에게 급히 알렸다.

11월 14일 이성계는 팔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밤에 김저와 정득후는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중과부적, 정득후는 자결하고 김저는 사로잡혔다.

심문을 받던 중에 김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안렬·이림·우현보·우인렬·왕안덕·우홍수도 함께 여흥왕(우왕)을 맞이하기로 도모하여 내응하기로 하였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11월 15일, 창왕이 폐위되고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즉위한다.

《고려사》 심덕부 열전에 나오는 기록이다.

『우리 태조가 심덕부·지용기·정몽주·설장수·성석린·조준·박위·정도전과 함께 논의하여 말하길,

“우왕과 창왕은 본디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 수 없다.

또한 천자의 명도 있으니 마땅히 가짜는 폐하고 진짜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1389년 12월, 우왕과 창왕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씁쓸하지 않은가? 국왕이 대신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해 목이 날아간 것이다.

어찌 보면 이성계는 주원장을 이용해 우왕과 창왕을 차도살인한 것이다.

나아가, 주원장이 보낸 성지의 문구를 다시 한번 보자.

지혜로운 신하가 왕도 갈아치우는데, 직접 왕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난 이성계가 주원장의 성지를 역성혁명의 '그린라이트'로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 조민수는 고려 왕조의 마지막 친위세력이었다.


그렇다면 이 일이 벌어지는 동안 조민수를 뭘 하고 있었나?

조민수는 창왕이 즉위하고 바로 다음 달, 탄핵을 당해 유배된 상태였다.

《고려사》 1388년 7월에 짧은 기록이 있다.

『조민수를 창녕으로 유배 보냈다.』


그런데 《고려사》 조민수 열전에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조준이 상소하여 탄핵하니 창녕에 유배 보내어졌고...

창왕은 좌대언 권근으로 하여금 조민수에게 술을 내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경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공이 덮을 수 있으므로 유배를 당함은 옳지 않소.

다만 즉위 초이므로 간신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창왕의 이 말을 주목하자. '다만 즉위 초이므로 간신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조민수를 탄핵한 건 이성계파인 조준이었다.

그 조준을 간신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건, 우왕과 창왕 모두 이것이 이성계파의 간계임을 다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조민수의 죄가 분명하여 이를 마냥 무시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유배 보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우왕과 마찬가지로 조민수 역시 시간이 지나 여론이 잠잠해지면 일선에 복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주원장이 중국에서 고려로 핵폭탄을 날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조민수가 탄핵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주원장의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조정에 복귀한 상태였다면?

그가 건재해 있었다면, 주원장의 성지 이후 이성계에 맞서 우왕과 창왕을 지키려고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성계를 위시한 반역 도당이 황제에게 왕을 모함하여 저런 말도 안 되는 성지를 이끌어냈다.'

조민수가 없으니 군부에서 중심을 잡고 이걸 해 줄 사람이 없었다.

유배지에서 이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조민수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다.


창왕마저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1389년 12월 1일 이색 부자가 파직되고, 조민수는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고려사절요》 1389년 12월의 기록이다.

『사헌규정 전시를 창녕에 보내어 조민수를 국문하였다.

전시는 조민수가 창왕을 세운 모의가 이색에게서 나왔다는 공술을 취하고자 하였다.

조민수는 굴복하지 않고 말하기를, “창을 세운 죄는 내가 진실로 홀로 감당할 일이다. 이색은 실로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여러 날 동안 핍박하니 그제야 굴복하였다.』

기록에야 '핍박했다'고 적혀 있지만, 여러 날 동안 고문을 가했단 뜻이다.

처음에는 버티던 조민수도 고문이 계속되자 결국 저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원하는 답을 얻고 나자 이성계 세력이 뭘 했겠는가?

그렇다. 조민수와 이색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공양왕은 조민수가 회군의 큰 공을 세웠으므로 거듭 죄를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며 1390년 1월 26일, 조민수를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데 그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민수를 죽이라는 상소가 계속되자 1390년 4월, 공양왕은 이성계와 심덕부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조민수에게 이미 죄를 가하였으니 경들은 대간을 설득해 다시 논죄를 고집하지 말도록 하라.』

이에 더해 같은 달 9일, 공양왕은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공신들을 포상하면서 조민수 역시 포함시켰다.

다시 대간이 조민수를 벌해야 한다면서 상소를 올렸으나, 공양왕은 듣지 않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390년 12월, 조민수가 죽었다.

《고려사》 조민수 열전에는 그의 죽음이 자연사로 기록되어 있다.

『얼마 후 〈조민수가〉 창녕에서 죽자 성헌과 형조에서 말하기를,

“조민수가 왕씨의 옹립을 막고 창을 왕으로 세웠으니 그 죄는 진실로 처형당해도 부족합니다.

다행히 처형을 면하고 천수를 마쳤는데도, 그 집안을 온전하게 한다면 후세에 경계로 보일 것이 없을 것이며 온 나라가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난 이것을 그가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가 죽은 시점이 절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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