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생 때 반성문을 쓴 적이 있다.
고립되었던 나를 친구무리에 끼워준 애가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나를 구해줬다고 믿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구원이 아니었다.
누군갈 찌르기 위한 도구로서의 초대였다.
그 애는, 예전에 나를 왕따 시키던 애들과 친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처음부터 안개였다.
미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안갯속에서 누군가가 방향을 잡아줬다.
내가 아니라, 그 애가.
어느 날 그 애가 말했다.
“너도 사달라고 해.”
그 말에 나는 키링 하나와 필통 하나를 집었다.
계산대에 올라간 물건은 키링과 필통뿐이었다.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그때 나는 그 무리 안에 끼고 싶었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며칠 뒤 그 애는 또 말했다.
“걔한테 편지 써서 ‘우리랑 가깝게 지내지 말아 줘’라고 말할 거야.”
그리고 내게 종이를 밀어주며 덧붙였다.
“이런 내용으로 써.”
나는 그대로 썼다.
내 손으로 쓴 문장이었지만, 내 마음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편지를 함께 쓰던 애들은
그 애에게 편지를 건네는 척만 하고, 결국 아무에게도 건네지 않았다.
대신 나는 혼자 움직였다.
키링과 필통을 다시 돌려줬다.
그리고 편지는 키링 옷 속에 넣어 두었다.
‘돌려주는 것’이 나의 마지막 양심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편지는 들켰다.
그 애의 부모님이 키링 속에서 편지를 발견했고,
학폭위가 열릴 뻔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더 심하게 왕따를 당했다.
그때부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시작됐고,
이상하게도 스토킹 같은 것까지 겹쳐서
우울감은 한 방향으로만 깊어졌다.
안개처럼 흐릿하게 괴롭힘 당하는 쪽,
번개처럼 사납게 괴롭힘 당하는 쪽,
어디가 더 아플까?
번개는 흔적이라도 남는다.
하지만 안개는…
그런데, 나를 가장 괴롭힌 건 안개도 번개도 아니었다.
안갯속에서 번개를 휘두른 나였다.
나는 지금 생각하면 솔직히
그 애에게 “미안하다”는 감정보다
“마지막까지 짜인 판 안에서 놀아났다”는 감각이 더 크다.
날 이용한 애,
내가 편지를 ‘준 것처럼 보이게 만든’ 애들,
그리고 그 상황을 즐기거나 방관했던 학교 아이들까지.
내 기억 속에는
그 모두가 하나의 안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경험이 남긴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이
내 안에서 이렇게 굳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다.’
‘내가 문제여서 생긴 일이다.’
그 이후 나는 스스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평온해야 할 순간에도, 내 안에서는 사이렌이 울렸다.
조용한 일상 속에서도
“지금 실수하면 또 버려질 거야.”
“지금 이상한 말을 하면 또 이용당할 거야.”
“지금 튀면 또 미움받을 거야.”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도 안전할 수가 없었다.
안갯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틀렸다고 적는 쪽이 더 쉬웠다.
나는 반성문을 썼지만
그 반성문은 사실
내가 잘못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혼자였다는 증거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