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요즘 어떻게 불리는지 잘 모르겠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알고 있다. 내게 5.18은 처음 광주사태로 시작한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시절 컬러 티브이가 보급되자마자 목격한 사건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너무 멀리서 사태를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폭동은 잘 진압되었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시간이 흘렀다. 잊힌 기억을 떠올리게 한 건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였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여전히 군사정부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5.18 이후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대학생활은 캠퍼스의 낭만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87년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민주진영은 정권교체에 실패했고 여전히 군사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생활은 여전히 정치적인 이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완의 혁명이라 불렸던 4.19와 민중항쟁이라는 5.18은 학사일정이 되어 동맹휴업이 있었고 이즈음 어김없이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나도 선배들에게 이끌려 집회와 시위에 참석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정치적 성향이나 소극적 성격 탓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1학년 때는 학교생활에도 익숙지 않고 나름의 소신이나 주관을 갖고 있지 않아 수동적으로 따랐지만 2학년이 되고부터는 되도록 집회는 피하고 혼자 도서관에서 5.18 사료집을 뒤져보았던 기억이 날 뿐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입대하기 전 학생들의 투신과 이를 보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고 한 변절자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나서 나는 5.18을 책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대학시절 본 5.18 사료집에서 당시 공식적으로도 다수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에게는 숫자가 주는 놀라움에 그쳤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5.18이 책을 통한 생생한 과거의 현실로 다가왔다. 많은 시간이 흘러 5.18에 대한 진상이 많이 규명된 후 쓰인 소설이라 예전에는 믿고 싶지 않아 과장이라 생각했던 학살이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5.18과 관련된 인물들의 개인사를 통해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점들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금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희생당한 정치적 자유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개인에게는 세상의 종말인 죽음을 강요했다. 소수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방종을 염려하며 다수의 자유를 억압했다. 소수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수의 노동자의 권리가 외면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불합리에 대한 변화의 요구를 표출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이어진 5.18에서 무자비한 탄압으로 끝이 났다.
벌써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 소위 제3세계 국가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 대부분의 삶은 윤택해졌고 자유로워졌지만 여전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있다. 그들이 억압받고 외면받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의 가벼움에 미안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