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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달빛책방

<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젠/ 강영희/은행나무>

by 오달빛

<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젠/ 강영희/은행나무>

그동안 일본 소설은 많이 읽어온 편이지만 중국 소설은 그다지 접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읽은 중국 소설로는 군제대 말년에 읽은 '사람아, 아 사람아'가 있고(20년이 지나도 제목을 기억하는 건 그만큼 책이 재미있거나 훌륭한 작품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본다.) 몇 년 전에 아주 흐뭇한게 읽은 '빨간 기와'를 들 수 있겠다. 두 책 모두 아주 만족스럽게 읽어서 중국 소설에 대한 부담감이나 거부감은 없었다. 이 책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대단한 역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내가 읽은 중국 소설은 모두 잭팟을 터트린거다. 그래서 중국 소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읽어도 손해보는 일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표집이 고작 3권이라서 중국 소설 전체를 평가하기엔 내가 봐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40여명의 주요 등장인물 지도가 맨 앞페이지에 있다는 것은 책을 읽는 데 도움은 되지만 나는 이런 지도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 스스로 나만의 인물 지도를 그려나가기 때문이다.(잘난척….) 괜히 이런 지도에 의지하다보면 나의 독서력은 자주성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네비게이션이 나를 점점 더 길치로 만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정유정의 '7년의 밤'은 책 맨 앞장에 마을 지도가 그려져 있다. 그 당시에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마을 지도를 펼쳐보면서 이야기의 장면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지도 또한 나만의 고유한 독서적 상상력을 가두는 틀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마을 지도를 앞장에 실은 것은 독자가 편하게 읽으라고 친절을 베푼 것일 수도 있지만 작가 자신의 글만으로는 독자를 이해시키기에 역부족이라고 작가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 아닐까. 소설가는 오로지 글로 표현해야지 그림을 곁들이면 반칙이기도 하거니와 만화가와 다를게 뭐란 말인가. 너무 오버했나??... 내 말의 요지는 소설책에서의 지도나 삽화는 독자 고유의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고 보니 논리가 궁색해서 이쯤해서 어물쩍 넘어가고..

이 책은 '백년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한다. 백년동안의 고독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가계도가 앞장에 그려져 있다. 백년에서의 인물 이름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나처럼 길어서 외우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 이름들에는 나름의 일정한 규칙과 반복되는 패턴이 있어서 몇 명만 외우고나면 서로 연결이 되어서 오히려 외우기가 쉬웠다. 그러나 뭇 산들의 꼭대기에 등장하는 중국 이름들은 처음에는 낯설어서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돌아 다니기만 했다. 그러나 그 인물들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지고 각자의 개성이 자리 잡게 되면서 이름들은 그들의 삶과 함께 내 뇌리에 확실히 각인이 되어서 읽어내기가 갈수록 수월해졌다. 이러다가 중국말까지 쉽게 배우게 되는 건 아닌지…


이 소설에서는 중심이 되는 독보적인 주인공이 딱히 없다는 게 특징이다. 아니, 등장인물 모두를 주인공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나는 줄거리를 요약할 때 전체 줄거리를 처음부터 늘어놓기보다는 인물별로 그들의 삶을 요약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 읽어보니 역시나 올바른 선택이었다.


등장 인물들 모두가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특히 나에게 인상 깊게 남는 인물로는 사형을 집행하는 안핑을 들 수 있겠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한때 나는 우연히 읽은 어떤 소설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가 그동안 써낸 소설 및 수필을 비롯하여 화장실 낙서까지 모조리 찾아내서 읽어내던 것이 취미였던 시절이 있었다. 전 작품을 거의 모두 읽은 작가로는 오쿠다 히데오, 무라카미 하루키, 은희경, 이문열, 필립로스, 코맥 매카시, 존 어빙, 마루야마 겐지 형님 등 무수히(?) 많이 있었는데, 안핑을 보니 오랜 전에 닥치는대로 읽었던 마루야마 겐지 형님의 소설 중에 그의 데뷔작인 '여름의 흐름'을 떠올리게 했다. 여름의 흐름은 숙련된 사형집행 교도관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살아왔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슬며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교도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 수작이었다. '여름의 흐름'의 주인공과는 달리 안핑에게서는 회의감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안타까운 사연의 사형수들에게 자신의 훌륭한 총솜씨로 깔끔한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자신의 일에 보람과 자긍심을 가지기도 한다. 죽음이 서려 있는 그의 손을 아무도 잡지 않으려 하지만 유일하게 그의 손을 잡아준 이는 운명의 여자 리쑤전이다. 안핑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리쑤전이 하는 일 또한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염습사이다.

대학 시절 병원 영안실에서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실제로 선배의 친구의 아는 사람의 친구가 급전이 필요해서 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맨정신에는 도저히 그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던지라 그날 밤 소주 댓병 2병을 마시고 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교통사고가 나서 피투성이가 된 처녀의 시체를 겨우 닦을 수 있었다는 일화를 선배의 친구의 아는 사람의 친구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물론 여학생들 앞에서는 그 정도 일쯤은 나에겐 소주 한병이면 충분하다고 큰소리를 쳐댔지만 내심으로 나는 염습을 당하면 당했지 절대로 시체를 닦는 일을 할 만큼 간이 크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염습사에 대한 편견은 '염쟁이 유씨'라는 감동적인 연극을 보고 나서야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염습사님들을 우리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고귀하고 숭고한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불철주야로 열심히 일하시는 그분들께 항상 감사과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염습사인 여자를 아내로 들이라고 한다면…그건 좀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않을까싶다. 어릴때 모친이 상갓집에서 떡을 가지고 오면 무서워서 근처도 가지 않았던 내가 염을 하고 돌아온 아내와 어찌 같이 살 수 있단 말인가..그런 가혹하고 난처한 질문은 하지 말자.. 그렇다면 염습사인 여자가 미스코리아처럼 예쁘고 돈이 많다면 어쩔래??? 흠…...직업으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원칙이자 소신입니다….


탕한청의 천사 같은 딸 탕메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추와 색계의 여배우 탕웨이를 상상하게 했다. 이야기 초반 그녀의 천사 같은 외모와 마음씨에 반했지만 왕연대장과의 연애, 그녀가 과거에 친구에게 저지른 치명적인 악행을 고백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안핑을 유혹하는 모습에서 좋았던 이미지가 다 깨져버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다소곳하게 여성스러움을 드러내거나 내숭따위는 떨지 않는다. 못생겨도 당당하고 씩씩하며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거나 적당하다 싶은 남자가 생기면 저돌적으로 돌격해서 사랑을 쟁취해내는 스타일이다. 공산국가라서 그런지 유교적 문화가 팽배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많은 이야기로 가득 넘쳐나는 소설이다. 각각의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는 너무도 생생해서 그들 각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따로 장편을 써도 괜찮을만큼 이야기의 소재 또한 제각기 훌륭하다. 시종일관 지루함을 허락하지 않고 끊임없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마구마구 쏟아낸다. 중국의 급변하는 근대 사회 제도들을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게 담아내는 것 또한 이 소설이 밀도 있고 탄탄한 소설임을 말해준다. 역자 후기에서 작가는 이 책에 나오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실제 그녀가 주위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쓴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자고로 자기가 말하는 것을 즐기기보다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습관부터 들이는 것이 작가로서 활동하는데 더 유익하리라 본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오는 별 비중은 없지만 정감이 가는 조연급 인물인 라오웨이의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즐겁게 살아. 어차피 즐거움이 끝나면 사람은 죽음으로 돌아가. 생고생할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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