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be 단풍보다는 자매

by 로라

나로 인한 생산은 달랑 딸 두 명뿐이다.

그런데도 난 딸 이름을 부를 때 첫째, 둘째, 심지어는 10살 차이 나는 여동생의 이름까지 섞어서 부른다.

흠......

해마다 달력이 바뀌는 12월에는 내년도 우리 가족의 생일과 기념일, 제사 날짜 같은 것들을 미리 기록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이가 몇 살인지 우리 결혼기념일이 몇 주년인지 언제인지도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갈수록 신기한 것은

엄마는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의 생일과 심지어 사위 생일들도 다 기억을 해서 한 번씩 전화를 하신 것인지 지금도 미스터리이다.

나도 잊고 사는 내 생일

이 세상 유일하게 우리 엄마만 기억하고 전화해 주신다.

"로라야, 오늘 생일인데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었지?"

다시는 들어보지 못할 나의 생일 걱정 많이 그립고 아쉬웁다.


꽃이 피는 봄에는 그리 꽃이 아름답더니

단풍 드는 가을에는 요사스럽게 또 단풍이 그리 아름답다.

"화무십일홍"이지만

어쩌면 단풍도 "단무십일홍"일지도

단풍이 유독 곱게 들었던 몇 년 전 파란 하늘일 때

엄마는 단풍 타고 하늘로 가셨다.


조금은 갑작스러웠던 일이라서 그 당시 힘들었으나 간사스럽게 요즘은 그때 11월 말이 정말 엄마가 가시기 딱 좋았다. 더 누워계셨으면 곧 닥친 코로나 정국에 장례식도 못 치를 뻔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혼자 피식 웃는다.



엄마가 타고 떠난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 때

동학사 담벼락에 피어오르던 담쟁이 단풍은 우리 마음을 더 흔들어놓는다.

일 년에 딱 한 번만이라도 우리 세 자매 만나서 엄마를 기억하고 생각하자며 했던 약속

전국 각지에 떨어져 사는 우리는 엄마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기일 때는 만나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우리의 뿌리 엄마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하고 엄마의 삶도 생각해 보고,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기울이면서 밤을 보내곤 한다.

각자 한참 자신의 삶에 너무 바빠서 힘든 그때

딱 중간인 곳에서 만나 보낸 짧은 하룻밤.

누구랄 것도 없이 이끼 낀 바위에 수줍은 듯 그러나 당당히 감아 오르는 붉은 담쟁이가

우리 엄마 같다고 입을 모았다.


저렇게 힘들지만 이겨내고 우리를 키워주셨지.......

너무도 붉.다

너무도 아.름.답.다


엄마와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우리 세 자매는 이리 잘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본다.

우리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엄마가 하늘에서 바라는 것임을 잊지 말자고

엄마가 주신 그 무한한 사랑으로 현생에 뿌리 단단히 내리고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얼굴은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들어있었다.


기와마다 그려진 해맑은 동자승은 우리의 바람일까?

우리 엄마의 모습일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해 질 녘 동학사 돌벽에 기어코 자리 내린 저 늠름한 나무를 보라.

서있는 이 자리가 곧 뿌리내릴 자리임을 알고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무는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아픔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저 자리에서 살아남았는지......

어둠이 그림자로 나에게 스며들어 내가 없어질 즈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밤늦게 까지 주고받던 술잔에 서로의 마음을 담아서 그동안의 어떤 회한과 원망도 다 녹여버리고

단풍처럼 붉게 물든 얼굴과

결국에는 단풍처럼 처연히 떨어져 기다리는 봄을 잉태할 나이의 여자로만 남았다. 밤이 깊도록......







홀가분하다.

나를 규정짓던 가족도, 남편도, 아이들도 다 속세에 두고

출가한 비구니들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는 묘한 밤이었다.

밤새 안주와 술을 먹은 것이 아니라 추억과 회한을 마신 것이 분명하다.

한 뿌리에서 각자의 날개를 달고 날아가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아왔다.

어느덧 엄마의 사랑과 추억이 몸에 배여

우리가 서로 닮아가고 있었고

그사이 하얀 서리가 머리에 어느새 내려앉아 있었다.


같이 태어나 그토록 달랐고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귀결점은

다시 "엄마"로 모이게 되는 그 특성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침이 되자 간밤의 추억은 잠시 세상을 버린 여자들의 모임처럼 다 접어버리고

현실여자로 돌아왔다.

내년 이날이면 우리는 또 올해 한 이야기들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꽃이 지고 단풍이 드는 색깔에 물들지도 모른다.

자매들끼리 미처 떨어내지 못한 앙금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색깔을 다시 잘 살려서 곱게 추억의 서랍으로 접어 넣기에 딱 좋은 계절

가을단풍이 빨갛게 얼굴에 내려앉았다.

단풍처럼 곱게 물들다 제 갈길 총총히 갈 수 있도록......

역시 단풍보다는 "세 자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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