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시린 바람에도 봄은 오는가

보미와 겨우리 이야기

by 도영

바람이 차가워도 봄은 왔다. 계절의 순환은 그랬다. 제아무리 추워도 결국 따스한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잎이 난다고. 하지만 이번 겨울은 어쩐지 끝나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고 못해도 두어 달은 지났을 터인데, 여전히 시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봄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나는 다시 겨울로 숨어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었다. 시린 겨울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어쩌면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봄의 아이들, '보미'라고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역사를 써 내려가던 세상이 사랑하는 겨울의 아이들, 봄을 미워하던 자들, '겨우리'도.


겨우리들은 예부터 아름다운 것, 예쁜 것을 우선시하며 좋아했다. 어쩌면 더 차가운 날들을 살아내기 위해 태어난 겨울의 아이들이기 때문인지 그들이 신체적으로 조금 뛰어난 면이 존재하기도 했다. 처음 겨우리들을 발견했을 땐 우리는 '변종'이라고 외쳤지만. 자연스럽게 효율이 조금 더 뛰어나 보이는 변종들을 일터에 투입하게 된 것이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낸 역사의 시작이었다. 물론 신체적으로 뛰어난 만큼 우리보다 지능은 떨어지는 편이었기에, 머리를 쓰는 일은 우리가 해냈다. 지시를 내리는 것도 우리 쪽이었고, 무언가를 구상해 내는 것도 늘 우리의 몫이었다. 그것을 실현하고 만들어 내는 것만 겨우리들이 할 뿐이었지.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나타난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은 언젠가부터 세상은 결과를 더 깊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더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신체 조건이 뛰어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쪽인 겨우리들의 편을 들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보미와 겨우리가 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가지면 반반의 확률로 '보미' 혹은 '겨우리'가 태어나게 되는데, 여기서도 '겨우리 선호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술적으로도 대단한 성장을 이뤄낸 보미와 겨우리들은 아이를 가지고 얼마 시간이 지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겨우리인지, 보미인지 알 수 있는데 보미인 경우엔 아이를 지우는 경우도 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미의 인구수가 눈에 띄게 줄었으며, 겨우리들이 가득 태어났다. 인원으로 자연스럽게 밀리다 보니 우리는 점차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머리를 쓰는 시간보다 어떻게 겨우리와 함께 살 수 있고, 겨우리를 위해 생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의 반이 겨우리의 것이고, 나머지 반은 우리 보미들의 것이었는데 이제 90% 이상이 겨우리를 위한 것들이 되었다.

그렇게 점차 봄이 하루, 이틀 짧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금씩 목소리를 내 우리의 자리를 되찾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가 제아무리 논리적으로 따져도 우리보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내뱉는 겨우리들에겐 그저 겨우리들의 인권을 빼앗는 일이라는 인식밖에 심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9:1인 것을 천천히 바꾸어 5:5로 나누어 평등하게 나아가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겨우리들은 7:3만 되어도 본인들의 자리가 우리에게 뺏긴 것이라며 억울함을 토해냈다. 지들이 3도 아니고 7이면서. 우리는 조곤조곤하게 겨우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최대한 상냥하게 의견을 전했으나 겨우리들에게는 조롱거리로 밖에 남지 않았다. 고작 우리의 존재가 겨우리들에겐 이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가.

늘 바람이 차가워도 어느 정도 따스한 봄은 오는 듯했다. 우리가 살아갈 구멍이 조금은, 조금은 보이기라도 하듯이. 정말 이번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직 부족한 점도, 개선할 점도,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할 곳도 많았지만, 우리 보미들은 서로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함께 손잡고 나아갈 수 있었기에 지치지 않았다. 가끔 지치더라도 서로가 함께 한다는 그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작은 것 하나라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밤새 얼마나 울었는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겨우리들이 느끼고 무언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우리는 앞으로 또 걷고 걸었다. 봄이 올 때까지, 따스한 봄이 올 때까지.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봄을 주지 않았다. 세상은 우리가 먼저 던진 질문들을 외면하고, 겨우리들이 이후에 우리에게 던진 불만을 품었다. 그렇게 멍청한 자들의 억지 논리를 받아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시트콤을 보는 것 같은데, 웃을 수가 없다. 세상은 시린 겨울에 물들어 봄을 묻어버린다. 분명 봄이 오고 있었음을 느꼈는데도, 시린 바람은 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 둘. 보미들이 시린 바람에 떨어져 나간다. 봄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나는 다시 겨울로 숨어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었다. 시린 겨울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어쩌면 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기에. 분명 그들도 이걸 바란 것이겠지.

마냥 이불속에 숨어 있으니 따스한 봄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았다. 우린 무엇을 위해 버텨왔던가. 제아무리 시린 바람이 불어도 결국 봄은 왔었는데. 서러운 마음에 시린 겨울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다. 쏟아내고 쏟아내도 시린 바람은 눈물을 차갑게 식혀 우리를 더 춥게 만들 뿐이었다. 우리는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불을 걷어차고 다시 시린 세상으로 나왔다. 아직 시린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보미들이 보였다. 나는 다시 세상에 함께 할 수 있는 보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불속으로 들어간 보미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시 시린 바람을 맞으며 세상을 눈에 담는다.

보미들아, 바람이 차가워도 봄은 왔다. 계절의 순환은 그랬다. 제아무리 추워도 결국 따스한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잎이 난다고. 우리가 기다리던 봄은 분명 돌아올 것이다. 함께 손잡고 봄을 기다리는 많은 보미들이 함께하고 있으니.

이제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닌 것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우리가 우리의 편이며, 우리이기 때문에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잘못된 것들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음을.

더 이상 상냥하게 말할 필요 없다. 본래 우리의 것이었던 것을 되찾아 오는 일에 양해를 구하는 일 따윈 필요치 않으니. 여기서 지쳐 이불속에서 다시 나오지 못하고 겨울을 인정하다면 우리가 다시 이불 밖으로 나올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겨울을 봄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게 될 테니.


우리가 쏟아낸 봄처럼 따스했던 눈물을 보라. 그것을 모아 따스한 봄비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니, 지쳐도 쓰러지지 않길 바란다.

보미는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헤카테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태초의 신은 인간이 서로 화합하며 살게 만들기 위해 두 가지 형태로 조금 다르게 창조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할수록 꽃은 짓밟히고, 나무는 시들어간다. 당신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평등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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