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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Jun 04. 2024

악연의 끝

  양아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예술고등학교 만화애니과로 들어갔다. 어느새 자라난 키는 170 센티미터를 넘어 너를 내려다본다. 입시도 혼자서 치르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스쿨 버스로 통학하는 모습을 보니 대학교를 미리 보낸 느낌이다. 


  학교는 어때? 지낼만해?


  예술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까만 크로스 가방을 메고 들어서는 양아에게 네가 이온 음료를 한 잔 건네준다.


  괜찮은 것 같아. 여기는 제갈길이나 독고다이가 많아. 혼자 있어도 전혀 튀거나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라서 좋아. 


  혼자 다니는 애들이 많아?


  혼자 다니는 애들이 많다기보다는 무리 지어 다니는 아이들이 없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더 촌스러워 보일 만큼.


  그림 그리는 애들이라 다른 건가?


  그런 것 같기도 해. 자기 세계가 강한데, 남한테 불편함을 주는 애들은 드물어.


  그런 학교도 있구나!


  여기도 문제아들은 있지. 대놓고 막 나가는 애들이라 나랑은 부딪힐 일이 없어. 혼자 망가져서 생활하는 거지. 선생님은 힘들 수 있을 것 같아. 눈치를 안 보는 애들이라…….


  특이하구나. 


  혼자 있다고 애들이랑 말 안 하고 지내는 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냥 여기는 자연스러워!


  양아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무리의 간섭이나 견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이의 입에서 학교가 다닐만한 곳이란 말이 나오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상담 주간에 담임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양아의 담임은 1학년 부장 선생으로 중년의 남자였다. 


  양아가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 성적이 아주 우수했네요.


  아, 네.


  이 정도면 내신 관리해서 서울권 대학을 목표로 준비해도 될 것 같습니다. 1학년 때 공통과목이 많아서 등급 관리를 해야 하거든요. 


  네, 그게, 공부를 강요할 생각이 없어서요. 고등학교 생활은 양아가 알아서 할 겁니다. 실기로도 대학에 갈 수가 있는 것 같더군요.


  네 그렇긴 합니다만, 서울권 대학은 내신성적도 높아야 하지만 수능 등급을 요구하는 곳이 많아서 말입니다. 


  양아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학창시절 보내게 하고 싶어요. 어떤 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수업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라고 지도하겠습니다. 


  담임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 기울이기도 했다. 여전히 성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공부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담임 선생을 향해 너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학교에서도 양아에게 성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으셨으면 해요. 여기로 들어오면서 그림만 그리겠다고 그랬거든요. 저와 남편은 양아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양아는 학교를 다녀오면 학원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온다. 혼자 조용히 네가 사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소주 석 잔에 취해 200만 원이 넘는 아이패들 선뜻 사준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양아에게 아주 유용한 미술 도구로 활용된다. 이제는 양아의 방에서 까만 지우개 똥을 치우며 구시렁거릴 일이 없어졌다. ‘노크 안 하면 벌금 만원!’이라고 갈겨 쓴 에이포 용지도 어느새 사라졌다. 심하게 얽혀버린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은 것처럼 일상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무의식으로 꾹꾹 눌러 놓았던 악연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미처 치우지 못한 부산물처럼 너의 직장인 고등학교로 은솔이가 신입생으로 들어온 것이다. 은솔이란 이름을 꺼내는 순간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일상이 다시 멈출 것 같아 양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은솔 엄마는 여전히 헬리곱터맘으로 아이 주변을 맴돌았다. 예전처럼 도우미를 자처하고 교문 앞에서 등교 지도를 하거나 복도 청소를 했다. 학교에서 너와 마주친 그녀는 마치 남의 땅으로 침범한 걸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은솔 엄마는 도우미를 그만둠으로써 너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녀의 딸은 공통국어 시간에 너와 대면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너는 두 모녀를 다시 만나면서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 질기다고 생각했다. 악연도 인연이라면 말이다.


  얼마 전까지 학부모 도우미 하시던 은솔 어머니, 요즘은 안 보이시네요.


  올해부터 1학년 담임을 맡아 학년부실에서 근무하게 된 너는 은솔이 속해 있는 1학년 4반 담임에게 물었다. 


  그 어머니 갑자기 그만뒀습니다. 처음엔 엄청 적극적으로 학교에 참여하시더니 갑자기 그러더라고요. 임원으로도 신청했는데 그것도 취소하고 말입니다. 차라리 잘 된 것 같아요. 자꾸 들락거리면 골치 아프겠더라고요. 애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은솔이요?


  네, 행실에 문제가 있었는지 생활기록부 내용이 좀 안 좋아요. 생활기록부에 이 정도로 기록되었다면 실제는 더 심했다고 봐야죠. 지켜보는 중입니다. 고등학교에 와서까지 학교 드나드는 부모들은 대충 견적이 나오죠. 은솔이 어머니는 아는 분이세요?


  아니요, 매일 보이던 분이 안 보여서 여쭤본 거예요. 학교를 자기 직장처럼 드나드는 분이 드물잖아요.


  애가 못 미더운 모양이죠. 자기 자식한테 믿음이 있으면 그냥 딱 믿고 보내잖아요. 얼마나 귀찮고 어색한 자리입니까. 학부모 참여 이런 거 좀 없애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말도 많아지고, 선을 넘는 부모들도 많아서 말이에요.


  공통국어는 일주일에 3시간을 들어야 하는 과목이라 은솔과 최소 주 3일은 봐야 한다. 은솔은 수업 시간 내내 눈을 깔고 있다. 수업을 듣는 것 같지는 않다. 판서도 해야 하고 자료 설명을 위해 피피티도 띄우는데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운동장이나 복도, 식당에서 은솔을 목격하게 될 때가 있다. 원래 양아 키의 반만하던 은솔은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초등학교 때 키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쩜 저렇게 똑같을까 싶을 만큼 변한 게 없다. 마치 초등학교 5학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은솔의 최대 관심사는 무리에 있는 것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무리에서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떻게든 수를 써서 무리를 끌고 다녔는지 모르지만, 고등학교에선 역부족인 모양이다.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때 은솔 엄마와 통화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은솔 엄마의 무례한 행태가 선명하게 그려져 당시의 불쾌함이 되살아났다. 지금이라도 후회와 반성이란 걸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불편함은 그들의 몫일 뿐이다. 그리고 너는 타인에게 무례한 사람들과 상관없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들과 옷깃이 스치지 않도록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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