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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May 28. 2024

햇볕과 운동

  방학이 끝나고 양아는 은솔이와 그 무리가 없는 학교에서 중학교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전 학교에서 사귄 오타쿠와는 간간이 연락도 하고 만나는 눈치다. 두 달이란 시간은 시나브로 흘러 진료일이 다가왔고, 남편이 양아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너는 도저히 신경정신과로 양아를 데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보, 병원에선 뭐래?


  첫날이라 이런저런 검사도 하고 이야기도 좀 해주시던데. 양아는 좀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것 같다고 그러더라. 예술가 기질이라고. 예체능 잘하지 않냐고 바로 그러던데.


  그래서?


  만화 그리고 있다고 했지. 예술가들은 어쩔 수 없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면이 있는데, 그런 다름을 그냥 인정해 줘야 한다고 하더라. 안 좋은 일 있으면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것도 그런 기질과 관련 있다고 그러더군.


  그래서, 기질이 그렇다는 거야? 우울증이 아니라?


  그게, 항우울제를 약하게 처방해 주더라고. 뇌파 검사도 하고 했는데 심한 우울증이면 뇌파에서도 나타나는데 양아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하시면서.


  정말? 뇌파에 감지가 안 되면 우울증은 아니라는 거네?


  우울증이란 말은 하지 않았는데, 항우울제를 처방해 줬단 말이야.


  뭐가 이렇게 분명한 게 없어.


  지켜보면서 처방할 모양이야. 2주 뒤에 다시 오래.


  항우울제는 부작용이 있을 텐데 걱정이네.


  병원을 다녀온 뒤 양아는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약을 챙겨 먹는다. 제 딴엔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알약이 많지는 않지만,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앞선다.


  엄마, 나 꼭 몸살 걸린 것처럼 여기저기 쑤시고 몸도 오슬오슬해.


  약을 복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염려했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기운도 없고 통 먹지도 못한다. 

 

  너무 힘든데 억지로 먹을 필요 없어. 일단 약 중단하고 병원에 가면 부작용 증세 잘 이야기해 보자.


  약 안 먹어도 힘들긴 마찮가지란 말이야.


  약을 먹으면 몸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다. 지독한 덫에 걸린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너도 힘들긴 마찮가지다. 다시 진료 날이 다가왔다. 여전히 양아를 데리고 병원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양아의 손을 잡고 또 다른 단두대로 오르는 심정으로 병원을 가야만 한다. 남편의 출장이 하필 진료일에 잡혔다.


  약은 어땠니?


  중년의 여자 의사가 양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물어본다.


  약 먹고, 몸이 좀 안 좋았어요.


  약이 잘 맞지 않는지 몸살 증세처럼 한기도 있고, 몸이 쑤신다고 했어요.


  그럼 약은 복용하지 않았나요?


  사흘 정도 복용하고 부작용이 심해서 먹이지 못했습니다.


  그럼 열흘 넘게 약을 복용하지 않은 거네요?


  날을 세어보던 의사가 너와 양아를 번갈아 보며 말한다. 마치 약을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걸 확인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네.


  양아와 네가 동시에 대답한다.


  제일 약하게 처방한 건데 부작용이 그렇게 심하다면……. 부작용이 없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음, 햇볕과 운동이죠. 지속가능하면서 가장 안전한 방법인데, 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약을 더 늘리지 않고 햇볕과 운동을 제안하니 일단 안심이 된다. 의사는 잠시 양아의 표정을 살피더니 다시 양아에게 말을 건넨다.


  좋아하는 운동 있니?


  수영요.


  수영 좋지. 매일은 못 가더라도 시간 나는 대로 수영을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날씨가 좋은 날엔 햇볕 쐬면서 산책하는 것도 좋고.


  네.


  순순히 대답하는 양아를 바라보던 의사가 다시 입을 연다.


  이제 양아도 자기 의사 표현을 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분명하게 의사전달도 하고, 억울한 상황이면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강하게 맞서면 되는 거야.


  너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 양아를 바라본다. 양아는 아무 반응 없이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아마도 의사의 처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약을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햇볕과 운동이라는 평범한 처방을 내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번엔 약을 좀 바꿔서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또 부작용이 있으면 약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의사는 생각보다 진료 시간을 길게 할애한 뒤 다음 진료 예약을 잡지 않는다. 병원을 나서는데 양아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왜? 기분이 안 좋아?


  내가 힘들다는데 이렇게 보내는 게 어딨어. 좀 더 적극적으로 처방을 해줬어야지.


  의사 선생님 보시기에 너는 햇볕과 운동이 더 필요해 보였겠지. 일단 운동부터 시작해 보자.


  그래도 낫지 않으면. 계속 우울하고 힘들면 어떡해!


  그럼 다른 병원도 알아보자. 병원은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른 병원을 알아보자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되는지 더는 말이 없다. 자신은 여전히 힘든데 병원에서 해주는 게 없다는 데 실망이 큰 모양이다. 의사가 햇볕과 운동을 처방한 건 어쩜 양아에게 힘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네가 보기에도 양아는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싶은 것에 대해선 확고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교로 가고부터 양아는 정말 방학 때 독일 마을에서 했던 선언을 소리소문 없이 실천하고 있다. 책상 위에는 교과와 관련된 도서가 모두 사라지고, 그림 도구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사비 연필과 지우개, 도화지, 마카펜 그리고 만화책……. 흐트러진 책상을 봐도 이젠 너도 화가 나지 않는다. 문이 잠기지 않은 아이의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아래로 떨어진 지우개 똥을 쓸고 뒤집힌 양말을 주워 방을 정리한 뒤 밤새 양아가 그려 놓은 그림을 본다. 제법 잘 그린다. 문득 중간고사를 쳤을 텐데 양아가 성적표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양아야, 너 학교에서 시험 치지 않았니?


  치긴 했어.


  성적표 나오지 않았어?


  나오긴 했는데.


  그럼 가져와야지.


  엄마, 성적표를 꼭 확인해야겠어? 나는 괜찮은데, 엄마 정신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성적이 형편 없는 모양이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는다.


  이젠 엄마 정신 건강까지 걱정해 줄 여유가 생긴 모양이구나!


  어차피 공부도 하지 않은 채 본 시험이라면 안 봐도 결과는 뻔하다. 양아의 말처럼 괜히 성적표를 보면 어렵게 지켜내고 있는 평정심이 사라질지 모르겠다.


  그럼, 네가 보여주고 싶을 때 가져오렴.


  응.


  양아!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 양아가 뒤돌아본다.


  그림 좋던데!


  자꾸 내 연습장 뒤지고 그러지 마!


  방 청소하다가 책상 위에 있길래.


  내 방 청소 안 해도 돼. 내가 불편할 정도가 되면 알아서 치울게.


  봐서. 웬만해야지.


  양아가 웃는다. 너는 잠시 거실에 오도카니 선 채로 방금 양아가 들어간 문에 붙은 ‘노크 안 하면 벌금 만원!’을 바라본다. 노크한 적은 거의 없고, 벌금을 내본 적도 없다. 참다 못해 경고문을 내걸었을 텐데 아이의 의견은 이렇듯 쉽게 무시되곤 했다. 너는 괜히 양아의 방문으로 다가가 두 번 노크해 본다.


  똑. 똑.


  당신 거기서 뭐 하고 있어?


  퇴근한 남편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온다.


  뭐, 그냥, 당신 왔어. 저녁 먹어야지.


  그래, 양아는?


  방에 있어.


  남편은 예상대로 노크도 없이 아이의 방문을 벌컥 연다.


  아빠 왔다.


  아빠, 노크 좀 하면 안 돼?


  아 하하, 그래.


  얼른 씻고 와 저녁 차릴게.


  이젠 양아와 남편과 셋이 앉아 저녁을 먹는다. 예전에 없던 선물 같은 시간이다.


  양아, 이번 주말에 수영장 갈까?


  남편이 말을 꺼낸다.


  응, 좋아.


  실내 수영복 새로 마련해야겠다. 양아 초등학교 때 입던 것밖에 없어서. 당신 뱃살도 많이 늘었고.


  당신 배는 없는 줄 알아. 피차 마찬가지야.


  뭐래. 나는 수영도 못하는데, 나까지 가야 하나?


  이참에 당신도 수영 좀 배워. 바닷가 갈 때마다 수영 못 한다고 그러지 말고.


  그냥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할게. 운동하는 게 목표니까.


  양아가 기댈 수 있는 약이 없는 대신 너와 남편이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죽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싹을 틔우는 나목처럼, 빙하를 건너와 싹을 띄운 씨앗처럼 언젠가 양아도 편안한 곳에서 자신만의 꽃을 피울거라고 믿는다.

  어느덧 양아의 중학교 시절이 끝나가고 있다. 양아는 지금 예술고등학교에 있는 만화애니과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다. 실기만 잘하면 되는데, 양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아무런 준비 없이 진로를 변경한 탓에 양아가 원하는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양아 오늘 잘 치고 와라. 엄마 아빠가 데려다주면 좋은데, 평일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오늘은 실기 시험이 있는 날이다. 시험 당일인데도 그렇게 긴장한 모습은 아니다. 혼자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가며 준비한 탓에 부족한 부분이 많을 텐데도 어쩐지 담담해 보인다. 오전 9시까지 시험장에 입실 완료해야 한다. 양아는 미술 도구를 챙겨 택시를 타고 예고 입시장으로 향한다. 4시간 동안 꼼짝 않고 시험을 치러내야 하는데,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후 2시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뜬다.


  엄마! 나 시험 끝나고 나오는 중


  시험 어땠니?


  괜찮았어. 그림은 완성해서 냈어. 완성 못 한 아이들도 있는 듯.


  잘했어. 울 딸!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하고 있어. 오늘은 엄마가 쏜다.


  ㅇㅇ


  혼자 입시를 치른 양아, 괜히 뭉클하다. 

  저녁 시간 가족과 함께 집 앞에 있는 솥뚜껑 삼겹살 집으로 들어선다.

  

  근사한 거 사주고 싶었는데, 기껏 생각한 게 삼겹살이야.


  솥뚜껑 삼겹살이 젤 맛있어. 


  그래, 네가 좋으면 됐어. 오늘 엄마 기분도 좋은데 술 한 잔 해야겠다. 


  부채살과 목살, 삼겹살이 솥뚜껑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다. 직원이 와서 고기를 구워주고 간다. 남편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혼자 술을 마신다. 술이 달다. 석 잔을 마시니 취한다. 


  오늘 기분 완전 좋은데, 양아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봐. 


  정말?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다. 


  그래, 엄마가 언제 딴 말 하는 것 봤어.


  그럼 나 아이패드 사줘! 그림 그릴 때 필요해.


  아이패드? 그게 얼만데?


  누가 기계치 아니랄까봐. 200만 원 넘어.


  남편이 한심한 듯 웃으면서 말한다.


  200만 원? 아!  


  엄마, 한 입에 두 말하지 않기. 


  그래, 기분이다. 사줄게 아이패드. 


  오 예!  엄마 술 취하니까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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