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희 May 25. 2024

양아라는 세계

  여행을 다녀온 뒤 방학을 맞은 양아는 만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상 아래로 새까만 지우개똥이 떨어진 걸 아주 오랜만에 본다. 도대체 뭘 하길래 지우개똥이 이렇게나 많이 나오는 거냐며 짜증을 냈던 때가 까마득하다. 너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양아가 더 나은 삶을 향해 가고 있는 건지, 정작 공부해야 할 시기를 놓치고 있는 건지에 대해. 분명한 건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양아를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상담과 그림, 휴식만으로 채워진 한 달이 지나가는 동안 너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잠시 비켜선 것처럼 다시 본래의 궤도로 진입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멋진데! 네가 만든 캐릭터야?


  양아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숨기지 않는다. 어떨 땐 은근슬쩍 자신 있는 그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니, 원피스에 나오는 카타쿠리야.


  원피스? 여자가 입는 그 원피스? 그게 만화 제목이니?


  엄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원피스는 오다 에이치로 작가가 쓴 해적 이야기야. 극장에서도 상영하고 예전에는 티브이로도 방영됐는데.


  하하, 만화는 졸업한 지가 오래돼서. 넌 언제 이런 걸 봤니? 티브이도 통 안 보는 녀석이.


  책으로 봤지. 도서관에 가면 다 있어. 지금 107권까지 나왔어.


  다 본 거야?


  아니. 97권까지 봤는데……. 엄마 오늘 만카에 갈까?


  만카?


  만화카페. 신간까지 다 들어와 있을 거야. 엄마 무빙 알지?


  그럼. 디즈니에서 드라마로 상영했잖아.


  무빙 원작자가 강풀이란 작간데, 엄마가 좋아하는 장르 많이 썼어.


  엄마가 뭘 좋아하는데?


  로맨스.


  풉! 내가 로맨스를 좋아했던가?


  ‘유미의 세포’ 티브이로 나올 때 재밌다고 막 챙겨보고 그랬으면서. 아무튼, 그쪽으로 잘 쓰는 작가야. ‘바보’ 같은 만화책 엄마가 좋아할 것 같아.


  그래, ‘바보’ 얼마나 재밌는지 한 번 가보자.


  방학이라고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겨우 일어나서도 좀처럼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양아가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한다. 방학은 오롯이 너와 양아의 시간이다. 남편이 부재한 평일 낮 딸아이와의 외출이 새삼스럽다. 예전 같았으면 양아는 영·수 학원에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늘 어떤 기관으로 보내고 너는 너대로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공부를 내려놓으니 삶이 달라지고 있다.


  카페가 지하에 있네. 이건 그냥 만화방 아니야. 공기가 나쁠 것 같은데.


  시내로 나와 양아가 안내한 곳으로 와 보니 지하에 만화카페가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왠지 담배 냄새가 나는 케케묵은 공간이 나올 것 같다.


  만카는 보통 지하에 있어.


  이런 데는 언제 와 본 거야?


  학교에 오타쿠가 있어서 걔가 나 여기로 데리고 왔는데, 가끔 오는 곳이야. 아, 그리고 엄마, 참고로 여기 음료는 대체로 맛이 많이 없어.


  하하, 그래 알겠어.


  이용료를 내면 기본으로 제공되는 음료가 나왔는데, 정말 맛이 없다. 만화를 보면서 타인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독립된 공간으로 만든 카페가 마음에 든다. 양아는 익숙하게 너를 안내한 뒤 원피스 열 권을 들고 너와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다락방 형태의 자리를 잡고, 양아가 추천한 ‘바보’를 펼친다. 몇 장 넘기다 보니 양아가 너를 어떤 수준으로 보는지 알겠다.


  ‘풉! 엄마를 뭐로 보고 이런 걸 추천한 거야.’


  유치하다고 콧방귀를 꼈는데, 계속 읽다 보니 빠져든다.


  ‘구성이 치밀한데, 재치도 있고……. 감성도 있고……, 미세하게 밀려든 이 감동은 뭘까?’


  1권을 다 보고 2권을 보고 있을 때, 양아가 나가자고 한다.


  좀 더 있다가 가자. 엄마 3권까지 마저 읽고 싶은데.


  시간 다 됐어. 추가 요금 발생한단 말이야.


  추가 요금이야 내면 되지.


  알겠어. 딱 한 시간만 보고 가는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만화카페라면 얼마든지 올 수 있을 것 같다. 그 옛날 담배 냄새에 절어 케케묵은 만화방과는 격이 다르다. 지하라는 걸 느끼지 못한 정도로 공기도 쾌적하다. 3권을 모두 읽고 무빙을 찾고 있을 때, 양아가 나가자고 재촉한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엄마 배고파 죽겠어. 밥 먹으러 가자.


  그래 벌써 두 시가 넘었구나. 여기도 음식 있네. 먹고 좀 더 놀다 가자.


  아까 음료수 먹어 봤지. 음식도 꼭 그렇단 말이야.


  아, 그럼 빨리 나가자. 브레이크 타임 걸리겠다.


  만화카페를 나와서 양아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다닌다. 언제 이런 데를 다녔는지 익숙하게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너를 데려간다.


  맛땡? 이름 재밌네. 뭐 파는 곳이야?


  파스타.


  이런 데는 언제 와 봤어.


  학교에서 야외 학습하고 오타쿠 친구가 나 데리고 왔는데, 맛이 괜찮더라.


  테이블이 다섯 개밖에 없는 작은 규모의 레스토랑이다. 청소년들이 찾는 곳이라 별 기대 없이 메뉴를 살펴본다. 역시 합리적인 가격이 눈에 띈다. 메뉴는 패밀리 레스토랑 못지않다.


  너 좋아하는 거 시켜.


  두 개 시켜도 돼?


  그래. 양아가 시키는 거 한 번 먹어보지 뭐.


  봉골레 파스타랑, 큐브 스테이크로 할래.


  그래, 자몽에이드랑 너 좋아하는 음료도 같이 주문해.


  양아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파스타부터 맛을 본다. 어지간한 레스토랑보다 훨씬 낫다.


  맨날 혼자 다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숨은 맛집도 알고 제법인데. 그 오타쿠 친구랑은 요즘도 만나니?


  응,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군데, 중학교 3학년 되면서 같은 반으로 다시 만났어. 내가 원피스 그리고 있으니까, 막 다가와서 말 걸고 그러더라.


  친한 사이야?


  그냥 뭐, 걔가 밥 먹을 때도 옆에 와서 먹고, 야외 학습 갈 때도 옆으로 와서 말 걸고 그래. 오타쿠 특유의 지질한 느낌 때문에 같이 있으면 조금 창피한데, 여자애 중에 그만큼 털털한 애도 드물지.


  주로 만화 이야기하겠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데, 불편한 이야기는 안 하더라. 그래서 친구 하기로 했지.


  뭐가 불편한 이야기인데?


  뭐, 성적이 어떻다든지 이런 거. 그리고 날 경쟁 상대로 생각 안 해. 걔는 공부에 관심이 없거든.


  그럼 걔는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데?


  그게 고민이래. 뭐가 되고 싶은지 자기도 모르겠데. 걔 말이야. 얼마 전까지 항우울제 복용했데.


  항우울제? 걔 우울증이니?


  내가 보기에 패션 우울증이야.


  가짜로 그런다고?


  그래, 자기 집에서는 공부로 스트레스도 안 주는데, 무슨 우울증이야. 요즘은 개나 소나 다 우울증이라고 하니까, 괜히 그런 것 같아. 가끔 자기 고민 이야기하는데, 나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사소한 일 가지고 엄살떨고 그러더라.


  그 친구는 지금은 어떻데?


  약 먹고 많이 좋아져서, 지금은 약을 안 먹어도 괜찮다고 그러더라고. 정작 나 같이 치료가 필요한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양아는 자주 자신이 우울증 증세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럴 때면 너는 우울한 감정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도 사춘기 시기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지. 그맘때는 의례 아무 이유 없이 슬프고 살기 싫을 만큼 힘겨울 때가 있단다. 그런 기분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거야.

 

   아직 어린 외모 때문인지, 양아가 우울감을 호소해도 그렇게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어떨 땐 엄살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가 매체를 통해 너무 많이 노출되다 보니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여름 방학이 끝나갈 때가 다가오니 상담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상담사는 그간 양아와 진행한 상담 내용을 알려주고 부모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고 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님, 방학 동안 양아가 집에서는 괜찮았나요?


  네, 그게 분명 좋아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여행 다녀오고 많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확 좋아진 것 같지는 않아요. 뭔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아이에게 맞추기가 쉽지도 않고요. 간섭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고, 과거에 힘들었던 얘기를 하면서 여전히 저를 원망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힘들었던 시간만큼 회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렇지만 공부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울증 증세도 보이고요.


  안 그래도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그러더군요. 애가 핸드폰으로 우울증 증세를 검색해서 찾아보고 그랬나 봐요. 자기랑 증세가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지금은 집에서도 압박을 주지 않고, 방학이라 학교도 안 가는데, 왜 우울할까요?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바로 괜찮아지는 건 아니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들어하면 병원 진료도 해보는 게 좋습니다.


  우울증약은 부작용이 많다고 해서……. 이곳에서 상담받는 학생 중에 병원에 다니는 애도 있나요?


  네, 우울감을 호소하는 학생들에게 병원을 추천해주고 있고, 예후도 좋은 편입니다.


  약으로 우울증을 극복한 학생도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럼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양아도 병원 진료가 필요할까요?


  어머님, 지금은 긴급 상황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많이 안 좋습니다.


  얼마나 안 좋길래요?


  양아가 한 말을 그대로 알려드리면, ‘산 채로 썩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상담사가 노트를 보며 양아가 한 말을 읽어준다. 너는 잠시 침묵한 채 눈을 감는다. 감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차올라 눈을 뜰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머니, 지금은 긴급 상황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양아가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어야 할 시기입니다.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요.


  곧 고등학생이 되는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가요!


  그래도 양아는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학교 안 가겠다고 하면 그냥 끝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학교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런 학생들은 상담 자체를 받으러 오지도 않습니다. 그냥 모든 걸 놓아버린 상태가 돼버린 거죠. 그나마 양아처럼 자기표현을 잘하는 아이들은 상담에 유리하죠. 양아는 표현력도 좋고, 말도 조리 있게 잘 하는 편입니다. 무엇보다 솔직하고요.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동안 숨을 쉴 수가 없다. 피와 살이 모두 빠져 나가버린 것처럼 껍데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양아가 웃을 때마다 금세 원래의 궤도로 올려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던 너는 여전히 위험한 엄마일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하루를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상담사와 나눈 말들이 밀려온다.


  아무 일이 없는데도 자살을 생각할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양아처럼 똑똑한 아이들이 더 위험합니다. 방향을 잃게 되면 더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양아가 바라는 건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라고 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데도요?


  도움을 요청할 때 그때 뭔가를 해주시면 됩니다.


  집으로 돌아와 양아의 방문부터 열어본다. 방문이 순순히 열린다. 불 꺼진 방안, 아이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있다.


  양아, 자니?


  대답이 없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는 거야? 밥은 먹었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평소 같았으면 줄줄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겠지만, 지금은 멈춰야 한다. 양아가 스스로 도움을 청할 때까지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상담사가 알려준 병원에 전화해 보니 예약이 많이 밀려 있다.


  여보, 병원 진료받으려면 두 달 넘게 기다려야 한데.


  참 요즘 신경정신과 찾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네.


  종합 병원도 아니고 개인병원이 이 정도로 붐비다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한 모양이다.


  우울증은 감기만큼이나 흔해졌다고 그러잖아.


  차라리 감기라면 좋겠다. 일단 예약은 해놨어. 그동안 어쩌지?


  병원 간다고 간단하게 나을 것도 아니니, 상담받으면서 집에서는 최대한 안정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줘야지.


  남편과의 대화는 언네부턴가 늘 이런 식이다. 양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공유하고 서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한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과 같은 불편한 감정이 점점 희미해진다. 다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양아를 치유하기 위해 하는 일들은 결국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아가기도 하면서.


*"산 채로 썩어가는 것 같다."(『백년의 고독』중 인용,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

이전 19화 기린에게 고기를 가져다주는 사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