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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May 16. 2024

대면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양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오늘, 상담은 어땠니?


  괜찮은 거 같아.


  상담 선생님은 어때?


  내 이야기 잘 들어주셔. 내 편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다행이구나! 그럼 여기서 일정 잡아주는 대로 상담받을 수 있겠어?


  응.


  비록 상담사와 마주하는 시간이 단두대에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지라도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다. 양아가 정서적으로 회복이 될 수만 있다면 너는 두려움 없이 몇 번이라도 단두대로 오를 것이다.


  다음부터는 혼자 갈 수 있겠니? 계속 조퇴를 내기는 어려울 것 같고, 혼자 와야 하는데…….


  대답이 없어서 옆을 바라보니 어느새 아이가 잠들어 있다. 저도 긴장했는지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신호 대기 중 차가 멈춰 서자 고요해진 차 안에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녀석이 코를 다 골고…….’ 아이는 먼 길을 다녀온 사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갸르릉 갸르릉 나른한 숨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살다 보니 빨간 신호에 걸려 있는 시간이 휴식처럼 다가오는 순간도 있다. 늘 빨간불에 걸리지 않기 위해 속력을 높여 달리곤 했는데…….


  집으로 들어오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


  상담은 잘 받고 왔어?


  음.


  양아만 상담받은 거야?


  애 먼저 상담하고, 첫날이라 보호자 면담도 했어.


  어땠어?


  양아는 괜찮은 모양이야. 계속 받고 싶어 해.


  그래 고생했네.


  상담 선생이 뭐라고 했어?


  첫날이라 대강의 이야기만 나눌 줄 알았는데, 가감 없이 아주 직설적으로 알려주더라. 가정환경부터 파악하는 것 같아. 엄마와 관련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어본 모양인데 공부에 대한 압박감, 체벌 이런 거 양아가 얘기했나 봐.


  그랬구나. 난감했겠다. 늘 그런 건 아니라고 그러지 그랬어.


  중요한 건 얼마나 자주 그러느냐가 아니고, 양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문제인 거지. 상담사는 양아의 말을 전해주는 것뿐이야. 거기서 변명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부끄럽긴 하더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만큼. 그 자리에 앉아 보면 알게 돼. 어쨌든 양아가 마음 편히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얼마나 다행이야.


  양아가 아빠에 대한 말은 안 했어?


  자기에 대한 말도 했지. 걱정돼?


  뭐, 하하. 그래 뭐라고 했어?


  아빠는 말이 안 통한다고 그랬대. 그나마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 말하는 게 차라리 낫다면서. 아빠는 자기한테는 혼낼 때만 말을 건다고…….


  와, 진짜!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뭘 혼낼 때만 말을 걸어.


  여보! 중요한 건 양아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거지. 자기도 자기 기준이 아니라 양아의 눈높이에서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그리고 다음엔 자기가 한 번 가봐도 좋을 것 같아.


  그러지 뭐. 부모 상담 있을 때 내가 갈게.


  남편은 자신은 지적받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어떤 변명을 늘어놓고 싶은 모양이지만, 네가 그랬듯 그도 그런 변명이 무의미함을 금세 알아차린 것 같다. 상담센터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마음이 안 좋은지 저녁 식사 후 서재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자몽 차를 타서 문을 두드린다.


  뭐 하느라고 꼼짝을 않고 있어?


  양아 어릴 때 찍어 둔 사진이랑 동영상 보고 있었어.


  어디 보자. 음 너무 귀엽다. 우리 양아가 이럴 때가 있었네. 진짜 활동적이고 잘 웃은 아이였는데…….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혼자 춤추는 것 봐.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잖아.


  그러니까. 삼촌들이랑 숙모님들이 양아를 제일 좋아했지. 낯가림도 없고 애가 밝고 명랑하다고. 이렇게 밝았는데, 못 지켜줘서 마음이 아프다.


  결혼 후 남편이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그의 눈가가 촉촉하다.


  여보, 양아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아직 늦지 않았어. 이제 사춘기일 뿐이잖아. 지금 심하게 앓고, 나중에 성장할 테니까.


  그래, 그렇게 돼야지. 건강하고 밝게만 자라줘도 고마운 일인데 말이야.


  이렇게 작정하고 상담센터를 먼저 찾은 부모도 이런데, 뭔가를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은 부모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이성적인 마음으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자식으로부터 부정당하는 순간과 대면하는 일을 결코 쉽지 않다. 밖에서 아이가 상처를 받고 오면 가장 먼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엄마다. 아이에게 부모로서 상처를 준 순간도 있지만, 단언컨대 사랑으로 보살핀 순간이 훨씬 훨씬 더 많았다. 상처를 주지 않고 모든 순간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 아이를 보살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 때문에 그간의 사랑을 모두 부정당한 기분이다. 이런 잔인한 순간을 견딜 수 있는 것도 실은 사랑으로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양아는 평생 알지 못할 것 같다.


  등교를 위해 집을 나서는 양아를 불러 세워 꽉 안아준다.


  양아, 힘내!


  응.


  키는 너만 한데 얼굴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양아가 애틋하다. 학교로 아이를 보내면서 마음이 편해질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수석 교사가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선생님, 시간표 변경할 게 있어요.


  오늘요?


  아니요. 다음 주 두 건 출장이 있는데 미리 시간표 교체해 두려고요.


  언젠데요?


  월요일 5교시, 수요일 3교시 교체 가능한 선생님 있을까요?


  한 번 볼게요. 음……, 월요일 5교시는 영어 선생님께서 바꿔 주시면 교체가 가능하긴 한데, 다음 주 수요일 3교시는 대체가 안 돼서 공강 처리해야 해요. 보강 날짜 잡으셔야겠어요. 언제 수업 가능하세요?


  교과교실제로 돌아가는 시간표는 일반 시간표와는 달라서 수업 교체가 어렵다. 시범학교로 운영되는 상태다 보니 아직 시간표 프로그램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수작업으로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래서 시간표를 바꾸는 일이 예전에 비해 월등히 줄어들었고 교체가 안 될 경우 따로 날을 잡아 보강해야 한다.


  목요일 자율 시간에 보강하도록 하죠. 수업 교체 어려워서 출장도 제대로 못 다니겠네요.


  영어 선생님께는 직접 연락해 주세요. 영어 선생님께서도 스케줄이 어떤지 모르니까요.


  그러지요.


  수업 교체 건도 끝났는데 교무실을 나가지 않고 어슬렁거린다. 수석 교사는 실이 따로 있다. 심심하면 교무실에 건너와 선생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평소 교류가 별로 없다 보니 겉도는 이야기만 하다가 가는 정도다.


  제가 요즘 입시컨설팅 건으로 의뢰가 많아서 출장이 많이 잡혔어요.


  아, 네.


  대학 입시컨설팅 정보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저는 우리 애들 제가 원하는 대학에 다 보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는 대학에요?


  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제가 일일이 간섭을 안 하니까 딴짓을 많이 하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부터 딱 잡고 완전히 아바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잡으려면 확실하게 잡아야 해요.


  잡히긴 하던 모양이네요.


  어설프게 잡으면 안 돼요. 아버지가 입시 전문가니까 자기들도 꼼짝 못 하고 따라왔죠. 입시는 전략입니다. 시키는 대로 안 했으면 우리 애들도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수석 교사는 무슨 대학 무슨 과로 보냈는지 물어보기를 바랐겠지만, 왠지 묻고 싶지 않다. 본인이 바라는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잠시 머뭇거리던 수석 교사가 멋쩍게 교무실을 나간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아바타를 만들어 보냈다니…….


  수석 교사가 나가고 네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 윤리 선생이 들어온다.


  아바타가 대학을 갔다고요, 쌤?


  아하, 아니요. 수석 쌤 시간표 변경한다고 오셨다가 자식들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보냈다고 자랑하고 가셔서…….


  아, 그 양반 진짜, 맨날 자기 자랑만 할 줄 알았지. 쌤은 수석 교사가 제일 싫겠어요. 시간표 변경도 제일 많이 하잖아요. 시간표가 얼마나 복잡한데, 시간표 만들 때도 요구 사항도 제일 많지 않아요? 쌤, 2학기 시간표 짤 때 또 막 요구하면 다 들어주지 마세요. 버릇돼요.


  요구 사항을 들어주고 싶어도 그렇게 돼야 말이죠. 교과교실제 수업 시간표는 모두 불편함을 분담하지 않으면 아예 만들 수가 없는걸요. 만에 하나 특정 교사 시간표가 잘 나온다면 그건 순전히 복불복이에요.


  아무튼요. 수석 교사면 수석 교사답게 본교에 도움을 줘야지 맨날 밖으로만 나돌고, 그게 뭡니까. 자리가 비는 만큼 다른 선생이 땜빵을 해야 하는데,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수업 죄다 3학년 수업으로 잡아달라고 그러고 말이에요. 수석 교사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공통필수 과목 맡아서 수업에서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죠!


  부모든 교사든 자신이 쥐고 있는 게 의무인지 권력인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너도 양아가 저토록 버둥거리며 저항하지 않았다면 네가 원하는 모습의 아바타를 만들기 위해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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