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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May 21. 2024

기린에게 고기를 가져다주는 사자

  양아는 상담을 착실하게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학교 생활이 나아진 건 아니다. 매일 아침 학교 가기를 힘들어하는 건 여전하다. 상급반을 나오고부터 학교는 양아에게 더욱 두려운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상급반 아이들과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불편한 시선을 받고 있다. 그간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선생들로부터 받던 관심과 신뢰로부터도 멀어지는 중이다.     


  엄마, 수학 선생님께서 ‘너 요즘 무슨 일이 있느냐, 왜 성적이 이렇게 많이 떨어졌냐’ 그런 말씀하시는 바람에 애들이 다 알아버렸어.


  학교를 다녀온 양아가 잔뜩 풀이 죽어 말한다.


  성적이 떨어졌는데 아무 말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니!


  그래도 애들이 듣고 있는데 그러는 거 싫단 말이야. 우리 반에 은솔이랑 같이 다니는 애들도 있고, 걔들이 선생님 없을 때 비아냥거렸다고.


  뭐라고 그랬는데?


  ‘별것도 아니네, 잘난 척하더니.’ 이러면서 자기들끼리 막 깔깔대고…….


  애들 정말 못됐다. 자기 할 일이나 잘할 것이지. 그건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따끔하게 주의를 줘야겠는걸.


  애들이 나한테 대놓고 그런 것도 아니고 나 지나갈 때 자기들끼리 말했단 말이야. 늘 그런 식이야. 자기들끼리 한 말이라고 하면 그만인 거잖아.


  비아냥이 몸에 밴 아이들과 양아는 어쩐지 세포부터가 다른 존재인 것 같다. 양야는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되는 걸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공격은 고사하고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순둥이들의 세계에서 최선은 방어뿐이다. 공격 세포 자체가 없는 존재들 같다. 너라면 어땠을까? 반문해 봐도 답이 없다. 의도적으로 시비를 거는 상대에게 응대하는 순간 싸움이 시작될 텐데, 상대는 무리라는 뒷배까지 있다. 어떤 수모는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양아는 그런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다.     


  여보, 양아 말이야, 전학시키는 건 어떨까?


  한 학기만 있으면 졸업인 애를 어디로 보낸다고…….


  애가 학교에 가는 걸 두려워하잖아. 안 좋은 아이들도 있고. 현재로선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좀 생각해 보자.


  여보, 시간이 별로 없어. 망설이는 동안 양아가 계속 힘들잖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냥 전학시키자. 


  남편에게 전학 이야기를 꺼냈을 땐 의논해 볼 생각이었는데, 말하다 보니 통보를 하고 있다. 기말고사도 끝났고 곧 방학에 들어가는 시기라 학교를 알아보기엔 적기이기도 하다. 사실 너는 남편의 동의 없이도 전학시킬 마음이다.


  이제 곧 방학에 들어가니까 미리 체험학습 신청해서 부담을 좀 줄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체험학습 신청?


  방학하기 전에 가족 여행 가면 되잖아.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해.


  막상 아이를 전학시키기로 마음먹고 보니, 왜 진작 보내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그저 버티라고 하는 동안 양아는 계속 힘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그런 아이에게 약해 빠졌다며 오히려 윽박지르기만 하지 않았던가.


  여보, 왜 우리 양아 같은 아이들만 힘들어야 하는 걸까. 당한 것도 억울한데, 전학에 상담까지 받아야 하고 말이야. 정작 타인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부모들이 그 정도 생각이 있었으면 그렇게 안 키웠겠지. 반성이나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야. 뭘 기대 하겠어.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거야.


  양아는 정말 내면적으로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을 만큼.


  아직 어리잖아.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여름 방학이 오기 전에 체험 활동 신청을 한 기간에 맞춰 남편도 휴가를 냈다. 이번에는 하늘도 돕는 건지 양아 학교보다 너의 학교가 먼저 방학을 맞아 세 식구가 함께 여행을 갈 수 있게 됐다.


  양아야, 이번엔 좀 먼 곳으로 갈까 하는데.


  남편이 말한다.


  우와! 어디로 갈 건데?


  독일.


  진짜 우리 독일 가는 거야?


  당신 순진한 애 데리고 뭐 하는 거야. 독일 마을로 갈 거야.


  독일 마을이 있어?


  음, 남해에 독일식으로 집을 짓고 꾸며놓은 마을이 있어. 독일 음식도 맛볼 수 있고, 가족들이 하루 머물긴 좋은 곳이지. 바다도 볼 수 있고 가까이 해수욕장도 있어.


  바다 수영 오랜만이다.


  학교 정규 수업을 빼고 여행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들떠있다. 여행을 앞둔 들뜸은 여행을 가기 전부터 여행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된다는 걸 그간 잊고 있었다. 게다가 양아는 바다를 좋아한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계곡이고 바다고 풀어놓으면 물고기처럼 논다.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싶을 때 물밑에서 발목을 잡고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제멋대로 논다. 여행용 캐리어 한 개에 세 명의 짐을 모두 담고 단출하게 짐을 챙겨 여행을 떠난다. 한참을 달려 남해가 보이는 해안 도로에 닿으니,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여름 휴양지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절벽 아래로 펼쳐진 푸른 바다 좀 봐. 꼭 지중해 같아.


  너의 말에 남편이 차창을 열자 따가운 볕과 짠 내가 흠씬 들이닥친다. 수면 위로 태양 빛이 수억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눈이 부신다.


  그러니까. 해안 따라 지중해풍의 카페가 많아서 더 그런 거 같아.


  해안 절벽을 따라 난 도로를 달리면서 너와 남편이 이런저런 감상평을 내놓는 동안 양아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고 있다. 자는 것 같지는 않고 생각에 잠겨있는지 바깥 풍경엔 관심이 없다.


  평일인데도 휴가객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해변 봐. 수영할 수 있는 깊이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어!


  은모래비치 해수욕장 주차장에 주차를 끝낸 남편이 해변을 바라보며 말한다. 모래밭이 뜨거워서 그런지 사람들이 모두 바다로 들어가 있다. 안전요원과 경비용 보트까지 바쁘게 오고 가는 해변은 축제장 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남해 바다라서 호수처럼 잔잔할 줄만 알았는데 파도가 높네. 여보, 난 수영할 줄 모르니까 그냥 해변에 있을 게. 양아랑 같이 들어가.


  이 뜨거운데 모래사장에서 괜찮겠어?


  바다에 올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수영을 매워둘 걸 그랬어. 수영도 못하는데 짠물에 몸을 담그고 어쩌고 생각만 해도 귀찮아.


  튜브 타고 놀면 되잖아.


  괜찮아. 사양할게.


  너의 말에 남편이 슬쩍 웃더니 튜브를 대여해 주고 간다. 래시가드로 갈아입은 양아도 신이 나서 바다로 달려간다. 양아와 남편이 한참을 신나게 놀더니 너를 향해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무리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해도 작열하는 해변의 열기를 맨몸으로 견디기는 힘들다. 너는 겸연쩍게 남편이 빌려놓은 튜브를 들고 바다로 들어간다.


  아악! 파도가 왜 이렇게 센 거니! 또 밀려온다.


  엄마 완전 겁쟁이. 파도 올 때 맞춰서 점프하면 돼. 하나, 둘, 셋. 지금이야!


  양아는 바다 태생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물에서는 두려움이 없다. 너는 튜브를 타고 있으면서도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무섭다고 호들갑을 떤다. 자식이 없었다면 어른이 되고부터 바닷물 속에 몸을 담그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중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몸이 제멋대로 부유하는 불안정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양아는 그런 너를 보며 깔깔 웃으며 놀리기도 하다가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시범을 보인다.


  엄마 머리를 물속으로 담그면 몸이 떠올라.


  안 돼. 엄만 못해.


  양아가 아무리 시범을 보이며 따라 해 보라고 해도 나무작대기처럼 굳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이는 사라졌던 지느러미가 다시 생성된 것처럼 물속을 자유자재로 부유하다가 물 표면 위로 튀어 오른다.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저렇게 자유로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막 몸을 담그고 놀기 시작했는데 비라도 한바탕 쏟아질 분위기다. 수평선 너머 뭉게구름이 길어지고, 파도가 점점 거세진다. 후두득, 굵은 빗방울이 바다 표면에 비비탄처럼 박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사람들은 나올 생각이 없다. 함께 기다란 줄을 뛰어넘는 것처럼 부력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 함께 떠오르며 깔깔댄다.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진 후에도 바다에서 한참을 놀고 난 후 해변을 빠져나와 독일 마을로 향한다.


  물놀이해서 그런가, 엄청 허기진다. 우리 밥부터 먹자. 배고파 죽을 지경이야.


  엄마는 튜브만 조금 타다 나와놓고선.


  그러게 말이야. 누가 보면 수영 엄청 한 줄 알겠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지. 리뷰와 평점이 좋은 곳 검색해 보고 맛있는 집으로 가자.


  남편이 운전하면서 식당 검색도 한다.


  위험해 여보, 검색은 내가 할 테니, 운전이나 신경 써.


  역시 독일 맥주와 수제 햄버거로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네. 별점 좋은 곳으로 가자.


  보조자 석에 앉으면 잔소리를 안 할 수 없다. 뭔가 산만하다. 운전에만 올곧이 집중하지 않는 습관 때문에 늘 불안하다. 딴짓을 엄청 하는 편인데 사고가 안 나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다. 너의 잔소리 샷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파악하고 목적지를 향해 속력을 높인다. 독일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검색해 둔 식당부터 찾는다. 독일식 이름인지 거센소리와 센입천장소리들이 마구 섞여 있는 이름의 식당으로 들어간다.


  독일 맥주 두 잔이랑 콜라 하나, 수제 햄버거 세 개요.


  남편이 추천 메뉴를 주문한다.


  죽기 전에 먹어봐야 할 맥주라고 적혀 있던데, 맛은 어때?


  남편이 물어본다.


  음, 좋은데! 햄버거도 맛있다. 양아 입맛에도 맞을 것 같은데. 어때?


  맛있어!


  맥주 한 잔과 햄버거 하나로 여행 온 기분이 물씬 난다. 맥주는 평소 마시던 것보다 향이 짙다. 맥주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취한다. 물놀이하고 와서 체력이 떨어진 뒤라 더 그런 것 같다. 식사가 끝나가고 프렌치 감자를 먹고 있는 양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해변에서 신나게 놀더니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오랜만에 양아의 얼굴에도 혈색이 돈다.


  양아, 엄마가 많이 미안해. 우리 딸 힘들게 해서…….


  감자를 손으로 집어 먹던 양아가 동작을 멈춘다. 그리고 잠시 후 빨개진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너의 사과가 진심으로 와닿은 모양이다.


  엄마가 앞으로는 울 딸 힘들지 않게 많이 노력할게. 좀 더 존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구나!


  아빠도 많이 부족했다.


  가만히 숨죽이고 너와 양아를 지켜보던 남편도 겸연쩍어하며 어색하게 입을 뗀다. 그 바람에 양아도 너도 피식 웃어버린다.


  엄마가 가장 문제가 많았다는 걸 인정해. 내가 가장 문제였어.


  아이가 힘겨워한 시간에 비해 사과의 말이 짧기만 하다. 뭐라고 더 말하고 싶은데 몇 문장으로 끝나는 게 못내 아쉬울 만큼……. 이렇게 불현듯 사과의 말을 건넨 뒤에는 어떻게 수습해야 덜 민망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양아가 입을 연다.


  상담 선생님께서 엄마는 ‘기린에게 고기를 가져다주는 사자’라고 말씀해 주셨어. 너무 사랑해서 자꾸만 고기를 가져다주는 거라고.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도 해주셨어?


  응.


  너를 가차 없이 단두대로 올려놓았던 상담사가 떠오른다. 양아의 편에서 양아만을 위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멘토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너를 사자에 비유하다니. 양아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양아야, 2학기 때 전학 갈 학교 알아보려고 해.


  정말? 전학 가도 돼? 갈 수는 있는 거야?


  그럼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네가 힘들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지금도 혼자 지내는데, 전학 가서 혼자 생활한다고 뭐가 다르겠어. 적어도 은솔이 무리는 보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 그럼 방학 끝나고 새로운 학교로 갈 수 있도록 해 줄게. 더는 고민하지 말고 방학 동안 편하게 지내.


  예스, 예스. 진짜 잘됐다. 말 나온 김에, 나 말이야, 이제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선행학습이니 뭐 이런 거 나한테 하라고 하지 마. 공부로 아이들하고 경쟁하는 거 안 하고 싶어.


  공부 안 하고 뭘 하겠다는 거야?


  나 만화 그릴래. 우리 학교엔 만화 그리는 애들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 비교당할 일도 경쟁할 일도 없는 거야. 적어도 학교 안에선 말이야.


  그럼 고등학교는 어떻게 할 건데. 인문계 안 갈 거야? 고등학교 진학도 고려해야 할 시기잖아.

  남편이 묻는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아직 학교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만화는 그리고 싶어. 만화 그리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성취감도 있어.


  모두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왔다. 더는 지연시킬 수도 선택의 여지도 없는 순간 말이다. 아직 어려 보이기만 하는 양아가 부모 앞에서 선언이란 걸 하고 있다. 너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조정간을 넘길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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