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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연 Apr 26. 2024

11. 트랙에서 누리는 자유

워킹맘의 숨 쉴 시간, 달리기

러닝 강습 장소인 공설 운동장에는 적갈색 트랙이 있다. 초창기 트랙에서 달릴 때 평소 한강에서 러닝할 때보다 지치고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첫 수업 때 코치님께 물었다.

“한 바퀴가 몇 킬로요?”

“... 400미터예요.”


평소 5km는 너끈히 달리는 나인데 왜 3~4 바퀴에도 훨씬 오래 뛴 느낌이 들었을까. 처음엔 한강에서는 풍경이 변화하니 그 맛에 상쾌한 기분이 들었던 거고, 운동장은 같은 장소를 뱅뱅 돌기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처음 몇 번은 심지어 트랙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더라면 진작에 러닝을 그만뒀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날이 풀려 근처 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서 체육수업을 하는 걸 보고 그 텁텁함의 정체를 짐작하게 되었다. 나에게 트랙은 측정받고 평가받는 곳이었다. 학교 체육시간은 100미터를 몇 초에 뛰는지, 오래 달리기는 몇 등을 하는지와 같은, 전체 학생 중에 나의 위치가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체육의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였다. 그나마 장거리는 반에서 10명 이내에 들었던 것 같은데, 100미터 달리기는 22초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그때는 평소 신체 단련보다는 학업에 힘썼던 시기였다. 당시 내 몸은 달리는 몸과 거리가 멀었으니 확실히 트랙은 타의적인 달리기의 상징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수업에 착실히 나가던 어느 날, 코치님이 수강생들을 운동장 위쪽으로 이끌었다. 신기하게 운동장을 빙 둘러 트랙이 또 있었다. 초록색으로 포장된 산책길 양 옆으로 키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운동장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것 같았다. 반바퀴 정도 돌자마자 눈앞에 벚꽃길이 펼쳐졌다. 사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분홍빛 작은 꽃잎이 흩날렸고, 수강생들은 다들 탄성을 질렀다. 분명 지난주까지도 을씨년스러웠는데 그날은 포근한 봄바람을 맞으며 일렬로 늘어선 벚꽃나무 밑을 달렸다. 설중런, 우중런은 해봤지만, 벚꽃런은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소중하고 순전한 기쁨이라 내년에도 잊지 말고 벚꽃비를 맞으며 달려보리라 생각했다.   

   

그 후에도 몇 번 두 명씩 열을 지어 위쪽 트랙에서 달렸다. 수강생들이 오와 열을 맞춰 달리다가 코너에서 휘어지는 폼을 맨 뒤에서 보면 꼭 다지류 같았다. 내가 머리가 가는 대로 움직이는 지네의 발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피식 웃었다. 몇 바퀴째인지 세지 않고 그저 한 몸처럼 움직이는 수강생들의 뒤를 따라 머리를 비운 채 달렸다. 벚꽃 효과가 없어도 이것도 나름 괜찮았다.      




얼마 전 미세먼지 경보로 휴강을 하고 오랜만에 다시 운동장의 적갈색 트랙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코치님은 이제 때가 됐다며 이전에 네 바퀴 뛰던 것을 다섯 바퀴로 올렸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트랙에서 뛰는 게 자연스러웠고 전처럼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장소도 장소려니와 수강생들과 열을 맞춰 뛰는 것도 편안해졌다.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닌데 내가 적응을 하고 만 것인가. 미세먼지 때문에 타의적으로 못 달렸더니 트랙에서라도 달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트랙이 더 이상 채점받는 장소가 아니란 걸 깨달아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지난날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한강의 풍광 덕에 질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날 탁 트인 한강에서 속풀이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평가받지 않는 자가 되어 어디에서건 누구와도 자유롭게 달릴 수 있다.

     

꽉 짜인 삶에서 깜짝 선물 같이 벚꽃런을 하는 날도 있지만, 평범하게 수강생들과 함께 트랙만 돌다가 달리기를 마무리할 수도 있다. 한강변의 아스팔트 포장길에서 강물의 일렁임을 보면서 뛰어도 좋고, 공원 안쪽 나무 사이의 좁은 흙길을 따라 달려도 좋고, 트랙에서 코치님의 지도에 따라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아도 좋다. 내 마음이 원해서 뛰는 한 나는 트랙에서도 달리기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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