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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연 Mar 14. 2024

05. 눈(雪)이 좋아질까요?

워킹맘의 숨 쉴 시간, 달리기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잠깐 머리 좀 식힐 겸 따끈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탕비실에 갔다. 먼저 커피를 내리고 있던 같은 팀 동료가 내게 말을 건넸다.

"눈이 많이 내립니다."

"그러게요. 이런 날은 좀 나가서 달려줘야 하는데 말이에요."

나는 조금 아쉬워하며 말했다.

"달리는 사람은 시각이 다르시네요. 주변 사람들 다 눈 오면 걱정부터 하는데.“

일은 안 하고 왠 달리기 타령이냐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나의 다정한 동료는 나를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나도 눈이 얼어 거리가 미끄러워지거나 녹아서 질척거리는 게 싫었다. 미끄러지지 않을 신발을 골라 신고 신경 써서 걸어 다니는 것도, 더러워진 현관을 청소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나는 추위도 많이 타는 데다 추우면 머리가 띵하고 귀가 욱신거려서 겨울 야외 활동은 선택받은 강골들만 하는 걸로 여겼다. 그런 내가 눈이 오면 나가서 달릴 생각부터 하게 되었다니 스스로가 낯설기도 했다.      


러너들은 눈이 오는 날 달리는 것을 설중런, 또는 설중주라고 부르는데, 통상 안전상의 이유로 눈이 오는 중이거나 눈이 쌓인 직후에만 즐길 수 있다. 그것도 익숙한 코스로 달려야 하고, 아파트 단지 계단 같은 미끄러운 곳에서는 살살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겨울에는 해가 짧아 아침과 저녁 모두 어둡고 한강에 인적도 뜸해 여자 혼자 달리기에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직장인 러너로서는 휴일에 날이 밝을 때 눈이 쌓여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다. 그러니 설중런은 4년 차 러너인 나에게도 몇 번 주어지지 않은 기회이다.             



눈 오는 날은 달리기 전, 옷을 입을 때부터 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설레기 시작한다. 두터운 러닝 쟈켓 속에 얇은 옷을 껴입고 나서, 러닝 장갑을 끼고, 넥워머에 비니로 얼굴을 둘러싸서 눈만 빼꼼 내밀면 제법 러너의 몸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뎌 한강으로 통하는 시커먼 굴다리를 통과하면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세상이 나타난다. 분명 며칠 전까지도 앙상하고 을씨년스러웠던 풍경이 소담스럽고 고와지는 모습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마저 든다. 대체로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철 한강도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고요한 편이다. 한파경보 사이에 즐기는 일종의 틈새 공략 달리기인 셈이다.  

         

눈이 오면 늘 달리던 길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것 같은 낯섦을 느낀다. 특히 어느 구간을 돌면 인적이 없어, 오직 나와 눈 덮인 세상만이 존재하는 듯 차박차박 내 발소리만 들리기도 한다.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 위를 달리며 뽀득뽀득 내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은 일상 속의 작은 모험과도 같아 통쾌하고 흐뭇하다. 눈 속을 뚫고 하루치의 달리기를 소화했을 때 느껴지는 충만함과 눈 덮인 자연의 멋을 마음에 담아 집으로 돌아간다.           


물론 아름다운 설중런 뒤에는 세탁이 기다리고 있다. 옷이야 원래 빨던 대로 세탁기에 울코스로 모조리 돌려주면 되지만 러닝화는 겨울철에 잘 마르지 않는다. 눈 오는 날은 보조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 게 좋겠지만, 첫 보조 운동화가 닳은 이후 아직 들이질 못했다. 신문지를 꾸깃꾸깃 말아 운동화 속에 넣고 햇볕 드는 창가에 내놓고 방수 바람막이까지 물로 헹궈 탈탈 털어 널고 나면 개운하다. 평소 세탁보다 두 배 정도 품은 들지만 이제 내게 눈 오는 날은 수고롭기만 한 건 아니다.


약골인 몸이지만 나가서 직접 눈 속을 달리는 경험을 해 보았을 때, 극기훈련이 될  했 겨울 달리기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김연수 작가는 최고의 삶이란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설중런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경험이고, 이런 경험을 몸에 새기면서 달리는 내 삶도 최고의 삶이 되는 거 아닐까. 그날 사무실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 비록 달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상의 자리에서도 깔나게 살 수 있다는 기대가 살포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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