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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랄 Dec 02. 2024

정의로운 삶-4

4. 내 이름은 순진

눈발이 내린다. 하얀 눈. 소복소복 쌓이는ᆢ

눈이 너무 무겁게 쌓여서, 가지가 부러지거나 꺾인 가로수들의 모습이 마치 나 같다.


제 드디어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짐을 벗어던졌다.


그걸, 선물이라고.


풋. 입가에 실웃음을 지어본다.


최정의. 걔는 나를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애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왔다.


그때 난 겨우 일곱 살이었다.

아마 토요일이나 일요일 밤이었던 것 같다. 


밤 열두 시까지 하는 영어 과외를 막 끝내고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고 잠깐 밖을 보았는데, 한 무리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아파트 놀이터에 모여서 엄청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아파트 50층 높이까지 들릴 만큼.


아저씨들은 술에 취해서 '넌 그렇게 살면 안 돼 인마ᆢ' 하면서 뭐라 뭐라 소리를 질러댔다가 말았다가 하고 있었고, 아줌마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수다를 떨다가 깔깔대고, 세네 명의 아이들은 아파트 내 공원을 계속 빙빙 돌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였다. 너무너무너무.


그때 보았다. "야! 뛰자!" 하는 그 세 마디를 남기고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를 한  번은 더 돌면서 놀던 그 아이의 얼굴을.


최정의.


같은 초등학교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지만,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다. 나는 그 애를 알아도 걔는 나를 모른다.

아니, 혹시 알 지도 모른다. 나는 매번 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최우수 학생들이 하는 '학생대표 선서'를 해 왔으니까.


하지만 걔는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 같은 애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애는 활발하고 명랑하고, 의리가 있어서 주변에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인기가 많았다.


엄마는, 내게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성적이 떨어지면 마치 세상의 끝이 온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이 가장 두려웠다.

내가 가졌던 것, 가지고 있는 것,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내 존재의 모든 가치가, 성적표에 쓰인 숫자로 결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의 모든 가치도.


나와 엄마, 아빠와 할머니를 제외한, 우리 둘의 존재가, 그 종이 쪼가리에 있는 숫자에 달려 있었다. 잉크에 무슨 마법이라도 건 것처럼.



최정의. 미안해.

너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게 되어서.


하지만, 나는 네가 수학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걸 봤고, 우연히 네 뒷자리에서 , 네가 중간고사 수학시간에 일자로 기둥 세우는 걸 봤어. 그리고 난 네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두워지는 걸 봤어.


네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어.


네가 그때, 밤 열두 시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면서 놀던 그 환한 표정을. 다시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어.


정말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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