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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하린 Mar 13. 2024

새의 선물

은희경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이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이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해 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비밀이란 심술궂어서 자기를 절대 보이기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에게 공유되기를 간청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미리 그런 상상을 통해 스스로 상처를 내놓으면 단련이 되어서 실제로 닥쳐오는 상처는 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행한 날에 행복한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친절하다. 


기쁜 일이 생겼을 때 마음껏 그 기쁨만 누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기쁨에 완전히 취하는 것도 삶의 악의를 자극하는 것이 된다.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람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대체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성숙해가긴 하지만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나는 사실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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