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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나다 Jun 17. 2024

"누누누 아아아" 동생을 만났다.

꼬마의 무겁고도 미안한 인형기억법


우리 동네나 다른 동네에도 누구 집 딸이 다리를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같다.






시골에서 아주 먼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발목 이상을 잃게 된 안타까운 여자 아이에게, 병원에서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여러 번 바뀔 때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병문을 왔다. 아빠와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 친하게 지내던 아빠보다 나이가 많은 삼촌을 우리 삼남매는 항상 큰아빠라고 불렀다. 아빠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휠체어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갔는데 우리 아빠가 아닌 큰아빠가 온 것을 보고 실망한 나는 휠체어를 뒤로 밀고 움직였는데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나는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혼자 어딘가로 갔다가 다시 1층으로 왔다. 큰아빠는 우리 아빠와 내 남동생을 데리고 병원살이에 필요한 여러 짐도 같이 가져오셨다. 차가 없던 아빠를 위해 큰아빠는 봉고를 타고 부산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셨고, 내가 퇴원할 때도 큰아빠 차를 타고 시골로 내려갔다. 우리 아빠가 친동생도 아니고 더불어 나는 친조카도 아닌데 그 먼 길을 매번 와 주신 따뜻한 분이셨다.


아직 말을 잘 못 했던 어린 남동생은 내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누누 아아아"

누나가 다리가 아프다는 뜻이었다. 아직 많이 어렸을 6살 언니와 2살의 동생은 여동생이자 누나인 내가 아프다는 것만 인지한 채로 하루아침에 엄마 없이 그렇게 한 달을 넘게 지냈다. 나는 어쩌다 한번, 하루 정도 엄마가 없는 병원생활이 힘들고 괴로웠는데 언니와 두 돌이 채 안 된 동생은 얼마나 엄마가 보고팠을까? 언니에게 물어보니, 아빠가 온종일 돌볼 수 없어 어느 날은 외갓집에 어느 날은 할머니 댁에 어느 날은 동네 이웃의 집에 맡겨졌다고 한다. 다들 따뜻하게 돌 봐줬겠지만 엄마가 그리워 축 처져 있었을 언니와 동생을 생각하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언니의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예쁜 분홍색 옷을 입고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인형을 들고 병원에 찾아오셨다. 내가 꽤 클 때까지 그 인형을 제일 아끼고 좋아했는데 선생님만큼 예쁜 인형이었다. 아직 유치원을 가지 않았던 나는 언니가 유치원 가는 것을 꽤 부러워했는데 예쁜 선생님과 함께하는 것이 제일 부러웠다. 그 예쁜 선생님은 2년이 지나 7살인 내가 처음으로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한때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자 꿈꾸게 해 주셨던 따뜻한 선생님은 육아휴직 직전에 아주 잠깐 내 동생의 유치원 담임까지 맡으셨었다. 우리 삼남매 모두의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었던 선생님은 남편을 따라 다른 도시로 전근을 가셨다.






무서운 강아지와 함께 살며 매번 주사도 아프게 놔주시던 우리 동네의 무섭게 생기셨던 보건소 소장님은 회색 강아지 인형을 사 오셨다. 소장님 집에 있던 무서운 강아지보다는 덩치가 꽤 큰 인형이었지만 눈이 크고 사랑스럽게 생긴 강아지 인형이었다. 소장님은 내가 다시 집에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셨고, 여름이면 빨간 장미가 예쁘게 피어나던 보건소에는 새로운 보건소 소장님과 가족들이 이사 오셨다.






엄마가 아주 잠깐 하룻 동안 집에 내려갔을 때 수능을 막 치른 고등학생이었지 아니면 대학생이었을 사촌 언니가 나를 돌봤다. 옆 침대 소영 언니도 벌써 이미 예전에 퇴원해서 소영 언니 엄마도 없고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5살의 나는 의지할 사람도 없는데 엄마가 없는 게 힘들어서 사촌 언니에게 심통이 나 언니는 집에 가라고 베개를 집어던지고 엄마를 데리고 오라고 고집을 피웠다. 그날 병실에 온 언니는 둘째 외삼촌 댁의 4자매 중 둘째 언니였다. 여드름이 나고 안경을 썼던 언니에게 나는 호감이 없었는지 연신 빨리 언니 집으로 가라고 했더니 착한 언니는 내게 우는 척하며 말했다.

"흑흑... OO가 언니를 싫어해서 슬퍼"


착한 둘째 언니는 끝까지 나에게 화를 내지 않고 병실에서 심술 맞은 어린 나를 지켰다. 언니가 집에 가서 외숙모와 다른 언니들에게 OO가 엄청 못되다고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언니에게 못되게 굴던 그때를 이야기하면 엄마는 아직도 내게 너무했다고 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가소롭기 짝이 없던 못생긴 어린 5살의 나보다 훨씬 예쁘고, 착하고 공부도 잘했던 언니다. 언니는 부잣집에 시집을 갔고 착한 형부와 조카들을 데리고 시골로 자주 내려와 옷도 사다 주고 용돈까지 줬다.






대구 외숙모가 병실에 찾아왔을 때 같이 데려온 새하얀 강아지 인형과, 병문안을 왔던 많은 분들이 어린 여자 아이에게 선물해 준 갖가지 인형들로 병실에 찾아온 이들을 기억했다. 방 옷장 위에 먼지가 쌓이고 또 쌓였던 인형들 그 고마운 기억을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반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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